그리고 단종은 조선시대 역사상 가장 최고의 정통성을 가졌으며 두뇌도 굉장히 초천재 엘리트 군왕이었습니다. 단종이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건 "운"이었습니다. 단종은 너무 어린 소년 나이에 즉위한 소년왕이었기에 단종이 힘과 세력을 키울 시간까지 그를 지켜줄 방어막들인 문종대왕이라던가 전부 다 너무 빨리 죽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집권 군인이자 문종이 가장 신임하였기에 단종을 지켜달라고 했던 김종서 장군도 계유정난이라는 군부 쿠데타와 동시에 사살됐으니까요. 하지만 단종을 측근 보좌 세력들은 다 사살됐으나 그는 너무나도 강한 정통성과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초천재 엘리트였기에 어떻게 보면 당시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정치가 굉장히 건강하던 시대였기에 수많은 유생들과 유교 학자들은 단종을 다시 즉위시키는 것이 조선을 정상화시키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육신이나 생육신이 죽었던 것이지요.
즉, 군부 쿠데타로 집권해서 마구잡이로 학살한 학살자 왕 vs 조선시대 역사상 최고의 정통성을 가졌으나 군권은 없는 소년왕인 상황이었기에 세조는 자신은 군부 쿠데타 하나 밖에 없고 정통성이라곤 1도 없었기에 단종을 어떻게든 죽이지 않으면 결국 반란의 규모가 커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조는 조선시대 역사상 선조보다도 훨씬 더 의심병이 강하고 날카로운 신경을 가져서 타인을 잘 못 믿던 군왕입니다. 이시애 장군의 군부 쿠데타가 발발했을 때도 한명회나 신숙주가 군부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적군의 거짓 보고가 올라오니까 구금시킬 정도였으니까요.
세조가 단종의 시신을 방치한 행위는 전쟁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적대 세력의 상징적 구심점 제거 전략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적의 군인 장군을 참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장군이 다시는 신격화되거나 추앙받지 못하게 하여 잔당의 결집을 막는 것입니다.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1일 기사에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자 예로써 장사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숙종 대에 이르러 단종의 복위와 관련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당시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고 엄흥도가 이를 몰래 수습했다는 기록들이 사실로 공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신을 방치하는 행위는 기록 말살 형벌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이는 승자가 패자의 존재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림으로써 패자의 지지 세력에게 심리적 패배감을 심어주고 반란의 의지를 꺾는 고도의 군사적 심리 작전입니다. 만약 세조가 단종의 시신을 예우하여 묘역을 조성했다면 그곳은 즉각 세조의 통치 정당성에 도전하는 반대파들의 성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단종의 시신을 방치한 것은 단종 개인에 대한 미움보다는 그가 가진 국왕으로서의 상징성을 완전히 파괴하여 다시는 복위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적 판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는 점령지가 군부 쿠데타의 근거지가 되지 않도록 주요 거점을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과 유사한 맥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