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마차, 도로를 발전 안 시킨 이유 침략, 국방

조선시대 마차, 도로를 발전 안 시킨 이유는 침략, 국방

by 바다의 역사




조선시대 한반도에서 도로와 마차가 발달시키지 않은 배경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고려한 고도의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대청제국 팔기군이 한반도를 압박하던 시대까지의 연대기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건국과 명나라와의 국제 관계 설정 시기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1392년 이성계 장군이 조선을 건국한 시대부터 조선은 사실상 명나라의 식민지로 스스로 자처해서 들어갔기에 사대 관계를 통해 국가의 안정을 꾀했습니다. 하지만 이 식민지에 가까운 사대 관계는 단순히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 끊임없는 조공, 내정 간섭, 압박, 견제와 요구를 이어갔고 조선은 초기까지는 명나라의 내정 간섭, 조공, 압박 등에 못 참고 결국 결사항전할 각오까지도 하다가 접은 적이 꽤나 많았습니다. 어쨌든 조선의 군사력으로는 당시 세계 패권국이었던 명나라의 대군이 한반도로 침략하는 것을 막는 것은 100%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선에 사는 시골의 개도 아는 상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조선은 국가 방어 전략의 일환으로 대규모 도로 정비를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 도로가 넓고 잘 닦여 있으면 외세의 침략군, 정복군대가 빠르게 이동하며 조선의 자원을 소모시키고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기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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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이미 초기까지도 막강한 중앙아시아계 여진족 기마군단들이 끊임없이 조선을 침략했기 때문입니다. 이만주 장군 같은 여진족 기마군단들은 조선을 약탈했습니다. 조선은 이러한 현실 때문에라도 산성 위주의 국방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조선의 지형은 산악이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며 험준한 천혜의 요새 같은 산맥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지형에서 넓은 도로는 적군의 기병대에게 고속도로를 깔아주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414년 5월 18일 기사를 보면 "도로를 넓히는 것보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적을 막는 것이 상책"이라는 논의가 실제로 나타난 것만 봐도 알수있습니다.









조선의 도로 정책은 철저하게 보병과 보부상 위주로 짜였습니다. 그렇기에 마차와 도로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닙니다.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은 한양 도성 주변과 일부 간선 도로에는 도로가 깔려있었으나 나머지 지역은 국방력 측면에서 청야 전술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일부러 도로를 깔지 않았습니다. 적이 공격했을 때 식량을 태우고 산성으로 들어가 버리면 적군은 좁고 험한 길 때문에 대규모 보급 부대를 운용하기 어려워지고 결국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퇴각했는데 여기에 도로를 깔아버리면 청야 전술이 힘들어진다는 계산 때문입니다.


게다가 조선시대에도 마차는 많이 있었지만 모두 국왕, 왕세자, 왕자, 왕족들과 귀족, 관료, 군 장교 같은 집권층들만이 쓸 수 있는 전유물이었습니다. 물론 동시대의 일본이나 유럽도 마차는 왕실과 귀족들만이 쓸 수 있었다곤 하지만 유럽의 경우는 부자의 경우도 쓸 수 있었고 비싼 돈을 주면 마차를 민간인들이 이용할 수 있었고 일본의 경우는 보다 훨씬 더 폭넓게 이용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명나라는 워낙 긴 평야 대륙이었기 때문에 마차없이는 이용이 불가능해서 황제, 군 장교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모두 마차로 이용하는 것이 철칙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조선시대는 마차를 거의 집권층만 쓰는 것으로 국한됐습니다.


17세기 초엽의 북시베리아인 만주 벌판에서 대청제국의 전신인 후금제국을 건국한 당시 세계 최강의 기병대로 불리는 대청제국의 팔기군은 그 기동력과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팔기군은 여진족 특유의 군 기동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1명의 기마 전사가 여러 마리의 전쟁마들을 갈아타며 하루에 150리 이상을 주파하는 가공할 만한 속도를 자랑했습니다. 팔기군의 이러한 세계적인 기동력은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를 순식간에 정복한 원동력이었고 이런 기동력을 저지하는 것은 당시 조선 국방의 최대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모든 국방 전략은 죄다 "북방"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조선은 팔기군의 말들이 빠르게 달릴 수 있는 평탄한 길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어라고 판단해서 일부러 도로를 설치하지 않았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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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볼 때 인조 시대에 겪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의 이러한 도로 정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대청제국 기병대는 얼어붙은 강과 좁은 길을 아랑곳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남하하여 인조도망왕,런조가 강화도로 피난할 길을 아예 끊어버렸습니다. 가뜩이나 도로를 까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조선 조정에서는 도로를 넓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한 공포가 더욱더 확산되었습니다. 비변사등록 인조 15년 기록을 보면 적의 기동력을 막기 위해 주요 길목을 폐쇄하거나 험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됩니다.











물론 중앙아시아계 북방 유목 군단들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도 좋고, 국방 전략도 좋지만 조선 자체가 워낙 춥고 식량 자원이 없는 쓰레기 땅이고 농업이 안 되기 때문에 조선이라는 땅 자체는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민족 역사상 가장 부흥한 국가인 고대 고구려와 백제와 발해와 신라와 가야, 중세 고려,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조선과 달리 발달했던 이유도 군사력도 있지만 상업과 공업의 발달에 있습니다.


상업이나 공업의 발달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선은 존립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마차, 도로를 설치해야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미 동시대에 중국, 러시아, 유럽, 일본은 마차, 도로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도로와 마차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인 연암 박지원은 그의 저서 "1780년 열하일기"에서 조선의 물류가 정체된 원인이 마차, 수레가 다니지 못하고 도로가 없기 때문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박지원은 대청제국의 황제를 알현하려 가는 사신단에 합류하면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닦인 고속도로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수의 마차들이 빠르게 오가는 모습과 그로 인해 가져오는 경제적 풍요를 목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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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은 영남 지역의 사과가 서울에서 귀하고 강원도의 나무가 평양에서 쓰이지 못하는 것은 모두 도로가 좁고 마차, 수레가 없기 때문이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고대 신라나 중세 고려까지는 도로, 마차가 발전하고 활발했기에 무역, 경제가 원할했고 발전했는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금지하거나 퇴보했기 때문에 조선은 결과적으로 중, 후기로 접어들면서 더욱더 국가 전반에 걸쳐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암 박지원의 실학 주장은 국가 안보를 걱정하는 보수적인 집권층 관료들의 벽에 부딪혀 실패한 개혁이 됩니다.


그 이후 이런 실학자들의 시도는 계속해서 벽에 부딪혀 제대로 제도화되지 못하면서 조선은 구한말 개항기까지도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대대적인 도로 정비를 수도까지만 시행하고 그외에는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분명한 손실이었으나 막강한 외세의 침략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 전략의 결과물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조선이 도로와 마차를 발전시키지 않은 것은 당시 지구의 냉혹한 국제 정치와 군사적 위협 속에서 선택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세계 최강의 팔기군의 침략에서 정면 대결을 벌이기에는 국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조선이 선택한 것은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한 비대칭 생존 전략뿐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조선은 수도나 수도 인근에만 마차, 도로들이 있을뿐 그외에는 백성들은 좁은 길을 걸어 다니며 짐을 직접 져 나르는 고통을 겪어야 됐지만 국가라는 틀은 수백 년간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는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조선의 좁은 길 위에는 당시 민간인들이 짊어져야 했던 안보의 무게와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처절한 노력이 새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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