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항상 고통과 함께 살아가간다. 어떨 때는 이런 고통이 올 줄 알아서 대비 할 수 있는 것도 있었을 것이고, 대부분은 정말로 아무런 준비 없이 막무가내로 다가온다. 그 고통은 어떻게 와도 견디기 어려운 일들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고통의 미래가 짧을 수도 있고, 어떠한 고통은 인생 전반에 구름을 드리우며 삶을 아프게 만든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러한 고통은 미래가 보이는 고통이다. 이 시기만 끝나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어 담담히 그 고통을 인내하며, 어렵더라도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도 한다. 어쩌면 사람을 만드는 고마운 고통일 수 있고, 부모님이나 제 3자가 보았을 경우에도 아주 타당한 고통이라 말하면서 격려의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식에 따른 고통이, 아픔이 나아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 부모는 심장 속에 쇳덩어리를 넣고 출렁거리며, 그 많은 세월과 부딪혀 가며 살아갈 것이다. 시지프스가 바윗돌을 굴러 올리고, 또 올려야 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큰 죄를 지었는지도 하늘에 대고 물어 보기도 할 것이다. 이런 큰 고통은 고통으로만 남지 않는다. 대상이 없는 분노와 좌절, 그리고 새 희망을 찾을 때까지의 방황, 몇 년간의 소나가가 마음을 씻고 나서야 안정이 찾아들 것이다. 고통을 눈물로 바꿀 수 있다면, 눈물로 아픔을 지울 수 있다면, 천 날이고, 만 날이고 눈물을 홍수처럼 쏟아 부을 것이다. 용서가 되지 않는 고통은 마음속에 가만히 앉아 응어리를 만들고 그 응어리는 또 고통을 만들어 내고, 한을 쌓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름속의 한 줄기 빛이 대지에 내려앉듯, 강한 희망의 빛이 하루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어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받아들이는 고통의 강도가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옛날, 아이가 없는 사대부의 아내는 종의 부부가 아이를 낳았을 때, 다가오는 그 고통은 차마 말로 못했을 것이다. 더우기 체면이 있어 그냥 물끄럼히 바라보며 애닯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 마님의 고통은 두가지로 나누어 질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여 아기를 얻는 방법을 찾거나, 포기하고 첩을 들이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는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그 마님은 그 고통이 하늘을 찌르고 남을지라도 가시밭길을 간다. 이것은 고통 없이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전제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하여 몇 년을 기도하면 아기가 생긴다는 장담도 되지 않는데도 이 길을 간다는 것은 아기가 태어났을 때의 그 고마움과 겪은 설움과 기다리던 반가움이 저 멀리서 손짓하는 그리움과 기다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움과 기다림은 같은 핏줄에서 태어난 형제와 같아, 한쪽이 없어지면 다른 한쪽도 존재의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사이가 되는 것과 같다.
그리움은 기다림으로 정화 될 수 있고, 기다림은 그 대상이 그리움으로 채워져 고통을 감쇄 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이 진한 고통은 어느새 마음 깊은 자리에 그리움으로 터를 잡고, 기다림으로 돌아와 생체기를 덮는다. 특히나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에는 그 아픔을 누가 더 말할 수 있을까.
그리움은 바람을 타고 오기도 하고, 구름에 실려 오기도 하고, 세월에 묻혀 오기도, 메아리로 다가서기도, 달빛, 별빛을 타고오기도 한다.
어디에 살아 있을 지도 모르는 아이,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 나에게서 보다 더 잘되어 있기를 바라는 아픔, 자신의 과거를 용서치 못해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흘러간 세월, 세월호나 이태원에서 사라진 아이, 자식, 그리고 사람들....
고통과 그리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떼어 내긴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고통으로 기다리는 것보다 그리움으로 기다리는 것이 좀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지만, 그 그리움이 하늘로 치솟아 별빛으로 다가설 때는 더 큰 고통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신을 찾을까, 그리움을 견디기 위하여 신을 찾을까. 원래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신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 같은데, 그 뒤에 더 큰 어려움으로 생겨난 것이 그리움이고 기다림이다.
누구라도 희망이 있는 고통은 고통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심하게 아파서 병원에 입원 했다면, 치료를 받아 나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이럴 경우에는 고통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아무리 아파도 이것은 그냥 통증이다. 이것은 그 누구라도 참고 견딜 수 있고, 그 보다 아프면 진통제를 쓰면 된다, 아픈 것이 무서워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아픈 것을 고통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내 영혼이 아프고 기댈 곳이 없는 경우에 적당히 쓸 말이 없다. 또,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설명하려고 들면, 내 영혼이 껍질에 싸이고 쌓여 욕만 얻어먹고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진정 내 영혼의 아픔을 이야기 하는 것이 고통이다. 이 고통은 약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통증과 구별되기도 한다. 한가지 세월이 약일 수는 있으나, 사람들은 약 대신에 세월을 먹으러 할 것이다. 세월을 먹으면 고통은 그리움으로 자리 잡는다.
[고통의 끝]
이 그리움이 영혼을 파먹기 시작한다. 영혼도 그리움 앞에서 할 말이나 대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특징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과, 또한 준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준비되어 일어나는 것은 사고가 아니라 그냥 시험이고 실험이다. 무안 공항의 일도 만들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 고통을 내재하고 있었고, 분노가 얽혀 있었으며, 책임지며 고통을 삭일 만큼의 해결책도 없었다. 분노가 끓어오를수록 고통은 심해지고, 억울함도 뒤섞여 쳐다보는 자의 영혼은 거의 탈색되었을 것이다.
이런 고통의 씨앗이 그리움을 낳게 만들어, 바람으로 구름으로 달빛, 별빛으로 스며들게 된다. 사람은 감정 및 감성의 동물이기 때문에 분노, 고통, 회개,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힘과 경향을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생각을, 자신은 더 깊이 파들어 가며 고통을 감수한다. 그 뒤에 무엇이 일어나고 말고는 생각치도 않는다. 다르게 보면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영혼이 답답하게 느끼면 같이 답답해하고, 영혼이 서러우면 같이 울고, 같이 분노하고 그러면서 그리움의 고개를 넘어 간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감에 있어 그 그리움의 대상이 필히 있을 것이다. 그 대상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고, 살아가는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그리움이 나를 지탱해주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연결 시켜주기 때문이다.
[마음 속의 또아리]
그리움은 고통의 씨앗으로부터 피어났기 때문에 그 고통의 의미를 되새겨주고 그 고통의 대상, 그리움의 대상이 항상 가슴속에 싹을 틔우며 나를 지키고 보호해 주고 있다.
어찌 보면 그리움은 생명의 존재 가치일수도 있다. 그리고 무슨 생명이든 자연으로부터 태어나고 세월을 타고 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리움과 함께 할 수 있는 계절이 가을 일 것 같다. 어쩜, 가을은 눈물샘이 터지는 계절인 것 같기도 하고. 노랗게 물드는 단풍이 아름답고, 저 넓은 석양이 황홀하고, 저 갈대밭에 들어 있는 내 영혼이 행복해지고, 그리운 사람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날 것 같은 계절이다. 큰 신작로보다는 오솔길로 걷고 싶고, 도회지 아스팔트보다는 시골의 논길을 걷고 싶고, 아늑한 시골의 냇가에 모래새 알품는 자그마한 자갈돌이 마음을 움직이고, 꼬불꼬불한 산기슭의 외로운 길에서 가만히 앉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싶다.
[기다림의 꽃]
꽃무릇이 왜 가을에 피는지 이해가 간다. 봄에 싹을 트는 잎을 보지도 만나지도 못하고, 가을에야 외로이 꽃을 피워 보고파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꼭 어떤 사람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을이 좋다. 누구나 그리워하고 애타게 보고파하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이 별빛타고 내려오면 그 큰 홍수가 되어도 좋으리.
가슴 따스한 사람이면 가을을 더 품을 수 있어 좋다. 가을은 손 빈 손님처럼 다가와 주인에게 묻지 않고도 가슴 깊은 곳에 또아리를 틀어도 좋다. 검은 빛을 내어도 좋고, 가을 단풍처럼 고운 빛을 내어도 좋다, 모두 나의 영혼과 친구가 되어 고통 대신에 그리움으로 남으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리고 기다림,
기다림은 지겨움보다는 들뜨게 하는 희망을 싣고 와서, 결국은 그리움의 열매를 맺는다.
[그리움 담긴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