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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Aug 15. 2022

낮에는 별이 없는 이유

아지랑이 피는 따스한 봄날에 저 멀리 수양버들 춤추는 뒤 배경으로 아련히 돋아나는 빛살은 얼어 있던 마음을 녹여 내려 현기증 나는 행복감을 느끼게 했다. 그 행복을 손에 쥐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써가며 하루를 넘기고, 그 행복은 내일 또 내 곁으로 오리라는 생각으로 봄을 살았다. 그 따스한 향기 속에도 얽히고설켜 풀어지지 않은 실타래가 똬리를 틀고 앉아 행복은 저 실타래가 풀리지 않으면, 또 길 떠나는 아지랑이같이 행복도 쓸어 가리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강바람이 건조된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뒤틀기를 하고, 안경 속엔 강바람이 찌그러뜨린 눈동자에서 시큰한 눈물이 배어 나오고, 강물은 나를 위로하려고 하지만 그 위로 난 나의 마음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강가엔 머리카락이 허옇게 새어버린 억새가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인사하는데, 꼭 나의 거울을 보는 것 같아 먼저 악수를 건넨다. 그도 살아온 것만큼이나 손이 차갑고 얼핏 설핏 살아온 상처가 눈에 띄기도 한다. 그래, 이처럼 하얗게 살았으면 그 상처는 살아온 훈장이 될 거야.  그래도 너는 살살 바람 부는 강가에서 고민이라도 있으면 씻어 내고 또 다른 아침을 맞을 수가 있지 않은가 이 친구야.    

 

저기 봐. 당신과 비슷한 또래들이 낚시를 하고 있지 않은가. 가까이 가보니 물고기를 낚는 것보다는 담배 연기를 뿜어 뱉어 놓고도 다시 빨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잡는다기보다는   세월을 풀어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아, 작고도 고운 꼬마 아가씨, 구절초보다는 꽃이 너무도 작은 것이 그렇게 소담스럽게 웃고 있네. 참 엉터리로 살아 왔나보다. 이전에는 꽃 이름을 찾아 실명으로 챙기곤 했는데 모르겠다. 소설가 김정한은 이름 없는 꽃이라는 말을 그렇게 싫어했다. 이름 없는 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어느 미물도 다 가지고 있는 이름을 불러 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기적인 것이지. 

미안하이. 세월을 지켜온 햇수만도 나보다는 오래된 것 같은데 이름조차 불러 주지 못하는 나그네가 당신의 행복을 또 빌어 줄 수 있을까.      


안 되겠다. 어렴풋한 기억이나마 불러내어 그대의 이름을 붙여 주어야겠다. 일단 큰 가지에서 자그마한 가지가 나와서 아주 작은 국화 같은 꽃을 피우고 있었지, 쑥과 같은 잎을 가졌으며, 흰색 꽃이었는데 약간의 하늘색을 품고 있었지. 인터넷을 뒤져보니, 쑥부쟁이, 벌개미취와 비슷하나 이들은 독립적인 꽃대를 가지고 있어 아닌 것 같고, 그나마 줄기를 가지고 자그마한 꽃을 피우는 것이 개똥쑥 꽃이 아닐까 하네. 이름이 맞지 않더라도 용서하시게. 그나마 기억을 더듬어 이름을 붙여, 당신의 행복을 빌어 드리려고 이름을 붙였네. 이 가을에 이름 없이 쓸쓸히 지나가는 것은 곧 닥칠 겨울에 너무도 춥지 않겠는가.     


아! 저 별빛, 어디서 보았을까. 저것이 낮에는 별이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인가. 깜깜한 역광으로 떠오르는 저렇게 고운 별빛. 물 위를 거치며 눈이 부셔 바로 쳐다 볼 수도 없는 찬란한 빛.

언젠가 보았던 아지랑이 뒤로 보였던 그 아련히 솟아오르던 그 빛.     


                                         [낮에는 별이 없는 이유(한강), 2019]     


그 봄에 따스하기만 했던 고마웠던 그 빛이,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도 그 생명을 부여잡고 지금, 이 강에서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나를 찾아왔다. 물살의 비늘일까. 어쩜 저렇게도 반짝여 나의 삶을 빛나게 하는가. 저 별빛이 환상의 섬으로 날아오르게 한다. 카이트 보드가 뛰어 오르는 것과 같이 나의 몸이 뛰어 오르고, 간질이던 강바람은 나에게 폭풍을 느끼게 한다. 그 위에 폭풍이 몰아치고 번개가 빛살을 타고 내려와 저 강 위에 앉았다. 아마도 베에토벤도 저러한 강한 빛을 잡고 품어 마음 쿵쾅거리는 운명 교향곡을 낳았으리라. 

    

저러한 찬란한 빛이 나의 머리를 가로질러 가슴에 안착하고, 용왕이 보낸 것만큼이나 거대한 붕어 비늘의 함성이 나의 단전에 멈춰 전신을 일으키게 한다. 나에게 다가온 가을은 언제나 나를 움직이게 해 왔지만, 저 윤슬, 그 빛살까지도 너무나 고운, 그런 가을이 나에게 들어왔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삶은 힘들다. 그 힘이 버거운 사이로 찾아온 저 윤슬은 지금의 나의 아픔을 모두 녹여 가기에 너무도 충분하다. 그래서 가을은 내가 해 준 것이 없는 데에도 저렇게 찬란하게 다가와서 나의 온몸을 전율케 한다.     


윤슬.     


가을을 끌고 와 더욱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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