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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Aug 21. 2022

사람은 수시로 방향을 바꾸는 풍향계

사월, 오월이 지나 유월이 되었다. 빈 나무에 연초록 눈이 트더니, 지금은 천하를 덮어내는 세력으로 나의 곁으로 와 있다. 식물들도 서로의 사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서로를 귀하게 여겨주는 질서를 구성한다. 절대로 고함지르지 않을 것, 서로 괴롭히지 않을 것, 같은 곳으로 가지를 내지 않을 것, 탐욕스럽지 않을 것, 나그네에게 쉴 틈을 제공할 것, 바람에 길을 내어 줄 것을 공동체의 자율로 베풀며 산다. 해충이 괴롭힐 땐 서로 피톤치드를 분비하여 공동 사회를 지키며 산다. 그러니 화낼 이유가 없다.


사람들도 자신들의 사회를 구성하고 살되, 규칙이 아닌 법의 존재 하에 살아간다. 많은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며 베풀고 살아간다. 더구나 사람은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 자기의 뜻을 조용하게 말을 해도 통할 수 있는 것을, 화가 나면 고함을 지르며 자신을 표현한다. 그리고 움직일 수 있는 장점을 이용하여 그 사회의 능률을 올릴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견디기 힘든, 인내의 한계를 초과하게 하는 일들로 행복을 느끼기 힘들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펼친다. 대부분은 나의 사랑을 타인에게 주려고 큰 노력을 하며 또, 그것을 보람으로 느끼고 살기도 한다. 사랑은 핸드폰같이 양방향 통화가 되면 참 좋을 텐데, 그렇지 않더라도 한쪽의 사랑이 더 많고 깊어지는 사랑이 더 진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손이 한 일을 다른 손이 모른다면 그 얼마나 큰 사랑이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반쪽으로 태어나 항상 그 전체가 되기 위하여 확인하기를 좋아한다. 또는 나의 사랑이 얼마만큼 전해져 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부모의 내리사랑이 그럴 수 있고, 자신을 밝히지 않는 퍼주는 사랑이 그럴 수 있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와 있는 사랑이 그럴 수 있다.


                                                [고집의 풍향계(미국), 2003]


그런데 사람은 수시로 방향을 바꾸는 풍향계와 같아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에 따라 그 마음 역시도 일정하지 않을 수 있다. 부는 방향에 따라 사랑을 맞추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사회의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어서 구성원 자체로서도 그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바람 부는 방향과 같이한다는 것은 그 사랑이 필요에 따라 변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사랑이 필요에 따라 변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익단체가 되지 않을까 한다. 사랑은 모든 방향을 엮는 것이어야 하고, 어떤 목적이 숨어 있으면 개인적인 사랑으로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무슨 사랑이든지 맹점이 존재한다. 사랑이란 사랑을 하면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은 사랑을 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억울한 사랑이 되기도 하고, 애타는 사랑이 되기도 한다. 에로스적인 사랑에도 자신을 지키는 것이 맞는 일인데 한쪽에 쏠리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중심을 잃은 배처럼 좌초되고 말 것이다. 비단, 죽고 못 사는 사랑에서 뿐만 아니라 나의 중심이 흐트러졌을 때 주위에는 많은 아픈 사랑이 떠돌아다닐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길은 홀로 가야 한다. 나의 가치관이 확립되고, 흔들리지 않을 때쯤에는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든지, 사랑은 나를 지킬 수 있고, 그럼으로써 타인을 사랑할 수 있으며, 씨앗으로 남아 나의 주위에 언제나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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