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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Sep 12. 2022

갖고 싶은 하루, 보내고 싶은 하루

어제가 있어 오늘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임이 틀림없다. 적어도 어제만큼은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하여 한 잔의 소주로 하루를 마감한다. 다행히도 소주는 신경을 마비시켜 어제 어떤 일이 있었던가를 지워주니 오늘의 일이 어제와 닮았다 한들 또 다른 하루를 맞을 수 있어 기분 좋다 할 것이다.     


더 다행인 것은 어떤 정신없는 사람이 너는 어제 무엇무엇을 했는데 또 같은 일을 하나 하고 지적하지 않아 좀 더 숨 쉴 기회가 되는 것 같다. 하루를 시작하고 잡는 것이 그리 어려운 건 아닌데, 꼭 달라야 한다는 이 심리는 무엇일까 모르겠다.


[공손한 일출(속초), 2017]

인간의 속성 중에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욕심이 있는 것 같다. 새로운 것에는 전신이 달라붙지만, 시간이 지난 것은 그다지 손에 잡기가 어정쩡하다. 그 봐, 하루라도 못 보면 죽을 것 같이 하루를 보내다가도 결혼하고 나면, 잡아둔 물고기 먹이 안 준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가. 하루의 시작은 누구 없이 경쾌하게 시작하여야 한다. 정신 나간 듯 웃어가며,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를 정도로.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적용된다. 공을 튀겨 보면 튀길 때 힘준 것만큼 튀어 오른다. 가만히 굴러가는 공을 보고 ‘너 인마 튀어 봐’라고 하면 구르든 공이 예 할 것 같아? 미친놈이라고 하지.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몸이 말을 안 듣기 때문에 조금은 힘든 삶을 살 게 되는 것이다.     


하루는 참으로 공손하게 다가온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고, 눈앞에 다가온 아침이 화를 내면서 눈을 뜨게 하지도 않는다.


단지 자기 기분에 못 맞추어 난리를 떨고 있는 자신을 보곤 할 것이다. 공손하게 다가온다는 것은 당신을 존경한다는 겸양의 표시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공손하게 다가옴을 왜 존경스럽게 대하지 못하는 걸까. 아마도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기능이 엷어져서 그럴 것이다. 어제 소주 한 잔으로 기분 좋게 잠이 들었으면 그 기분으로 일어나 공손한 하루를 맞으면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시끌벅적한 하루가 시작되고, 그다음은 하루를 담아야 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조금은 색깔이 다양하게, 어제 담은 것 말고 새로운 뻑적지근한 것을 담고 싶어, 무언가를 재미있게 시작해 본다.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가 생기 있게 들리고, 윈도우 떠오르는 소리가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기분 좋게 출발한다.     

 

마치 그 소리는 ‘주인님, 오늘은 참 미남이시네요’라고 말을 걸어 주는 것 같다. 참 기분 좋은 하루가 내 곁에 있어서 좋다. 참, 그 옆에는 10년 만에 꽃을 올린 벤저민의 미소도 덩달아 웃게 만든다. 주인이 그렇게도 무뚝뚝하고, 살가운 것이 전혀 없고, 짜증만 내는 못난 주인으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 이들은 주인을 닮지 않아 밝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어 고맙다. 주인도 미안함을 느끼기는 하지만 쓸데없는, 필요 없는 자존심으로 다가가 말을 걸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다. 그래도 한 번씩은 쓰다듬어 주는 것이 그리도 좋았나 보다, 그것을 정이라고 생각하며 내 곁에 있는 것 같다.   

   

메일이 뜨고, 그 내용에는 단 일 초라도 웃음이 나오게 하는 내용은 없다. 우표 없이 도달되는 편지라 무슨 그리 많은 편지가 와 있는지, 나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들을 왜 그렇게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바보같이, 네가 능력이 있으니깐 이런 일들이 쏟아지는 것 아니야 하고 대어 들겠지만, 난 그저 하루를 잘 넘기기 위하여 프로그램으로 훈련된 산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왜 알아주지 않는 거지, 이것이 답답함의 출발인데. 난 열심히 일해, 단지 머리에 들어앉아 있는 세포들이 만족하지 못할 뿐인 거지. 

    

모든 생물은 자기만족으로 살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비단, 사람만은 자기만족에다 무슨 성취한 기분이 있어야 한다는 야릇한 심리가 있어, 평생 편안한 하루는 지내지 못한다. 용맹한 사자는 배가 부르면 살아 있는 다른 것을 취하지 않는데, 사람은 꽉 채우고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또 채우기 시작한다. 이것이 스스로는 성취감이 되고 사는 맛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 하루를 갖고 싶어도 버리는 하루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넘어가는 해를 보고는 왜 그리 빨리 쉬러 가느냐고 앙탈을 부리기도 한다.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이야기지. 자신이 일을 마칠 때까지는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지. 얼마나 편안한 논리인가. 자신에만 맞으면 되는 행복, 얼마나 뿌듯하겠어.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꼭 꼬집어 말하기는 싫지만,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에 기대고 있어, 그렇게 아쉽게는 생각하지 않을 것 같지만, 누구에게도 내일이 보장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루를 결산하는 것이 옳다.      


죽은 자가 갈망했던 오늘이었든지, 오늘의 투자로 내일을 벌 수 있을 것인지, 오늘의 빚으로 떠내려가는 내일에 발을 동동 구를 것인지를 매듭을 지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오늘을 갖고 싶은지, 보내고 싶은지를 정리해 보고 공손한 내일에 대하여 겸손히 맞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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