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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Nov 05. 2022

식물에게조차 닦달거리는 사람

(가을에 다시 핀 꽃)

나는 꽃을 좋아하고, 기르고 있다. 요즈음 나의 집 넓은 테라스엔 한해가 기울어가는 늦가을에 여러 종류의 국화가 엄청난 키를 갖고 피고 있다. 그 중에는 정상에 도달하고 난 뒤 시들어 가는 꽃도 있다.     

사람들도 가을이 되면 좀 외롭고 고독스러워 지지만, 더는 허무하지 않고 좀 깔끔하게도 무언가 손에 쥐고 의미 있는 일 년을 마감하고자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올해,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을 겪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봄에 피었던 꽃이 가을의 추위에 잎이 메말라가고 있었는데, 정성스레 보살폈더니 다시 싹이 올라오고 자라더니 꽃망울을 맺었다. 모자라는 생각에 저 꽃도 나처럼 가을을 추하게 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마지막 힘을 내어 아름답게 일 년을 보내려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나도 올가을엔 조금은 사람답게 보내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올해는 어쩐 일인지 병원 생활을 많이 하여, 혹 어떤 사람은 삼재라고하는,  왜 그런지 원인을 찾아보았으나, 건강을 잃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거의 30년 가까이 새벽에 헬스클럽에 가서 1시간 넘게 운동을 하고 사워하고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해 왔다. 2월 중순 쯤에 코로나에 감염되어 기침이 심하여 병원에 연락하니, 와보라고 해서 갔다. 기친을 하고, 숨쉬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국립의료원에 입원을 시켜버렸다. 15일 정도 병원생활을 마감하고 돌아 왔다. 이어서, 4월 달엔 걷기가 불편하여 주위의 정형외과에 들렀더니 괜찮다고 하면서 진통제를 주었다. 몇 곳을 더 가 봐도 같은 답이 나왔고, 심지어 대학병원에 갔는데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차츰 통증이 심하여 MRI를 쵤영했더니 허리에 디스크 비슷한 증상이 있다고 수술을 하라고 했다. 요즈음은 양방향척추내시경으로 수술하여, 시술에 가까워 빠르게 일상생활에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서울의 병원에 예약은 해두었지만 너무 통증이 심하여 움직일 수 없어 지역의 병원에서 수술을 하였다. 올해는 조심해야 하는 해이구나는 직감이 들었다. 조심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어서, 7월에는 종기가 깊게 나서 또 수술대에 올랐다. 3개월 정도 고생을 했다. 같은 해애 수술대에 두 번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이 기간 동안 우리 집 테라스에 많은 식물과 꽃이 있었는데 잘 보살피지 못해 너무 마음이 아프고 답답했다. 10월에 돌아와 보니 식물들은 혼이 나가버렸고, 생명을 걸고 세월 앞에 멍하니 있었다. 퇴원하고 돌아오는 날 바로 테라스 정리에 들어갔다. 많은 식물들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꽃들을 걷어내고 산뜻하게 정리를 하였다. 집을 떠나기 전에는 너무도 많은 꽃들과 싱싱한 식물들이 나를 보필하고 건강하기를 기원하듯 했다.    

 

넓은 테라스를 정리하고 남아있는 장미, 한해살이 꽃들이 너무 지쳐 있어 돌보기 시작했다. 5일정도 되니깐 나을 기색이 보이고, 영양제와 물을 주었더니 10일 쯤 지나서 새롭게 잎이 돋더니, 또 10여일이 지나니깐 새로이 봉오리가 맺히고, 며칠 지나서 아주 예쁘고 큰 꽃을 피웠다. 역시 삶은 아름답게 매듭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고맙고, 부재기간 동안 돌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용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가을에 다시 핀 꽃(2022.11.05.)]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너무 열심히 살아왔다. 국가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밤낮 실험으로 세월을 붙들어 매고, 특허를 내고, 국제잡지에 등재를 하는 등, 같은 일들을 쳇바퀴 돌듯이 살아왔다. 누구도 그랬을 것 같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지내왔다. 그 결과가 병원 생활을 한 원인일 것으로 생각한다.     


꽃이 봄, 가을에 두 번 핀 사실을 친한 동료 교수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엄청난 회초리로 돌아왔다. 그의 말이 교수님은 식물에게까지 그렇게 닦달거리냐고 한다. 그는 식물도 가을이 되면 편히 좀 쉬어야 하는데, 쉬고 싶은데, 물을 주고, 영양제를 주고, 얼마나 닦달거렸으면 꽃을 피우겠냐고. 좋은 말도 있을 텐데(누구나 쓰는 ‘최선을 다한다’, 하다못해 ‘들볶는다’ 등), 닦달거린다는 말을 썼다. 내가 ‘그렇게나 주위를 못살 게 굴었나’ 하는 생각과 ‘한번 집중하면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애가 섞인 말로 들리기도 했다.     


햐! 나의 본 의미와는 엄청나게 틀리지만, 생각을 해보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나도 쉬고 싶을 때 쉬고 했으면 병원에 가지 않아도 괜찮지 않았을까하는 머리 찡하는 생각과, 나는 저 꽃이 다시 한 번 자신을 일으켜 꽃을 피우고 행복하게 겨울을 맞았으면 하는 생각이 혼돈으로 다가온다.     


정말 다시 꽃을 피우는 일이 그리도 답답했는지, 말도 못하는 식물에 내가 너무 닦달거려 안식을 잃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주인님 감사합니다라고 할지, 너무 괴로웠습니다라고 할지 그 대답이 은근히 기다려 진다.    

 

결국, 나는 나 자신을 ‘닦달하여’ 현재에 도달했고, 저 꽃은 내가 ‘닦달하여’ 예쁘고 큰 꽃을 피웠으나, 그게 자신의 마음을 주인이 읽지 못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자연은 자연속에서 순조롭게 윤회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일 진대, 좀 더 뜻있고 의미있게 살아보고자 하는 것이 자연의 뜻을 거스러는 것인지, 그래서 철학이 발달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미련한 자는 “닦달거리다”와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동격으로 생각하며 하루를 맺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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