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에 상처도 따라온다.
평범하게 무색무취의 일상을 살고 있는 나에게 간혹 이민에 대해 문의해 오시는 지인들이 있다.
이 분들께 내가 먼저 질문드리는 내용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주변인으로 살 각오가 되어 있으신지요?
2) 처음 10년 고생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지요?
3) 가족 분들은 같은 생각이신지요?
이 글에서는 세 번째의 질문에 대해 나의 경험과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민을 결심하게 되는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개인적 발전의 욕구이다. 커리어적 성장을 위해서 다국적 기업/스타트업 본사에서 일하고자 하는 소망, 한국에서의 삶에 지치고 연공서열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높아진 외국어 구사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능력 및 장래성이 타 국가에서 더 빛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전 세대들에 비해 양질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시스템적 문제로 인해 사회 진출과 경제적 자립의 길이 훨씬 어려워진 청년 계층의 경우 이와 같은 개인 발전의 욕구는 더 두드러진다.
다음으로는 자녀의 교육과 가족의 장래 계획에 대한 욕구이다. 영미 국가들이 금융과 세계의 질서를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영어를 필두로 한 외국어 구사력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으며, 자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자 이민을 결심하는 부모들은 상당히 많다. 한국어와 영어 사이에는 상당한 이질감이 있어 유럽 및 인도계 이민자들에 비해 적응에 불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이민이 끊이지 않는 주된 이유는 바로 이 점, 자식에 대한 사랑과 고민 때문일 것이다.
보통 이 두 가지의 욕구는 융합되어 나타나며 개인적 발전 욕구를 충족시킨 다음에 이후 각자의 처한 상황 - 특히 자녀의 유무 및 가족의 거주 의사 - 에 따라 계속 머물 것인지 한국으로 귀국할 것인지의 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은데, 개인적으로 처음부터 이민을 시도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예전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현 전공 분야의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했어했지만 경제적으로 마땅치 않아 회사에 다니면서 가급적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대학원 유학에 도전했다. 이후 학위과정 중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유년기의 자녀들이 이 곳의 자유로운 환경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느낀 후 현지 취업에 뛰어들었다. 어느덧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이젠 나 하나보다 아이 세 명의 인생이 훨씬 중요한 상황이 되었기에 현 상태를 유지하며 이민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 부모 세대에 해당하는 이민 1 세대의 경우, 본인의 개인 발전 욕구는 온전히 접어놓고 오직 자식의 장래만을 위해 이민을 결행하고 피땀흘린 노력을 통해 훌륭하게 2세대 자녀들을 키워내신 분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희생하거나 잃어버린 것들이 적은 나로서는 대단히 존경스러운 분들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가족의 입장과 거주 의사는 이민 결정 및 지속 여부에 큰 영향을 끼치기에, 이민을 결심하신 분들이라면 최우선적으로 가족과 우선 상의하고 이들이 본인의 결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함께 새 환경에서 적응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지금껏 보아온 사례 중 몇 가지이다.
남편 A 씨는 미국에서 학위 이후 현지 취업을 목표로 했고 그의 발전 욕구는 A 씨의 가족이 유학 후 이민울 선택한 주 동기였다. 그러나 A 씨의 부인은 이 결정을 좋아하지 않았고, 미국에서 언어 습득과 같은 적응 의지를 보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불만을 토로하였다. 학업 이외에도 육아, 가족의 의료/행정 잡무를 도맡아 하던 A 씨는 결국 어렵게 졸업 후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부인 B 씨는 미국에서 학위 이후 현지 취업을 목표로 했으나 해당 전공은 외국인이 영주권 없이 취업이 어려운 분야였다. B 씨의 남편 C 씨는 B씨의 학위 과정 중 식당 일을 하며 영주권 스폰을 받아 B 씨의 졸업을 앞두기 얼마 전 결국 영주권을 받았다. 현재 B 씨는 현지 취업에 성공하여 C 씨와 함께 평안히 살고 있다.
미혼인 D 씨는 현재 모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비록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지만 연로하신 어머니를 생각해 귀국 의사를 밝혔다. 그녀의 어머니는 꿈을 이루라며 그녀의 생각에 완강히 반대, 결국 그녀는 현재의 이민 생활을 유지하되 어머니를 더 자주 찾아뵙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으며 근처 회사원인 E 씨와 교제 중이다.
해당 사례들은 가족이 한 팀으로서 역할을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결과물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민의 삶은 쉽지 않으며 매 순간이 변화의 연속이다. 변화의 과정에서 불완전한 '나' 라는 인간은 때로는 가장 소중한 존재인 가족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나 역시 학위 과정 막판 스트레스로 인해 불필요하게 첫째 아이를 혼내는 일이 잦았으며, 진솔한 감정 소통을 거부한 결과 아내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했다. 영주권 진행 과정 중간에도 가족을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이 극히 적었던 관계로, 둘째 아이의 어릴 적 모습을 많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아쉬운 부분이다.
마찬가지로 변화의 과정에서 여유가 없어진 가족 또한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이전 A 씨 부인의 사례와 같이 내가 가장 힘든 순간, 나를 지탱해 주는 대신에 가족들의 좌절은 나에게 비난의 화살로 돌아올 수 있다. 이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 중 하나이다.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각각의 가족 구성원에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다. 비록 일시적으로 부족한 각자의 모습으로 인해 흔들릴 수 있을지라도 큰 틀에서 우리는 한 팀이고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믿음이 있을 때,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그렇기에 이민의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께 나는 이 질문을 세 번째로 드리는 것이다. 가족 분들은 같은 생각이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