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연작
시골을 가려면 시흥 쪽에서 들어가거나 안산 쪽에서 올라가야 했다. 안산 쪽에서 올라가면 먼 친척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굽이굽이 지나 짧은 언덕으로 올라가야 했는데 그 언덕 초입 오른쪽에는 넓은 포도밭과 작은 집이 있었다. 몰라 할머니가 사는 집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골은 가족이 없는 먼 친척들이 살 수 있도록 작은 집이나마 내어 주고 살게 해주는 인심이란 것이 있었다.
언덕을 다 오르면 오른쪽에 커다란 철문이 나오는데 그곳이 우리 시골집이었다. 철문을 열면 20미터 정도의 콘크리트길이 나오는데 이 길 양쪽에는 벚나무가 죽 늘어서 있어서 때맞춰 가면 벚꽃 잎 흩날리는 짧은 꽃길을 지나갈 수 있었다. 꽃길이 끝나면 둥글게 만든 주차장이 나왔고 주차장 오른편에는 빨간 벽돌 계단이, 그 오른편에는 아름드리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벽돌계단을 굽이굽이 다 올라가면 정면 오른쪽으로 넓은 잔디밭이 펼쳐졌다. 둥글게 펼쳐진 잔디밭의 둘레에는 갖은 나무와 꽃, 덤불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비스듬히 오른쪽 끝에는 통나무 벤치를 흉내를 낸 콘크리트 의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늘막 아래 벤치 너머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 앞의 벤치는 할아버지가 연못에 풀어놓은 비단잉어와 향어의 먹이를 주며 감상하는 자리였다.
연못 너머로는 바로 작은 산으로 연결되었는데 그 산 깊숙이 들어가 본 것은 한 번밖에 없지만 갈 때마다 아버지는 그 산에 들어가서 등산을 즐겼다. 언젠가는 공기총을 사서 꿩을 잡겠다며 한동안 사냥을 다녔지만 꿩을 잡아 돌아온 적은 없다. 가끔씩 참새나 몇 마리 잡아 할아버지를 갖다 드렸는데 그걸 또 할아버지는 무척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잡아온 참새의 깃털을 손수 벗기면서 군침을 삼키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종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에게 그 참새는 아마도 최고의 안주였을 것이다.
계단 정면 왼쪽에는 역시 빨간 벽돌로 지은 커다란 양옥집이 자리 잡았다. 계단 몇 개를 올라 현관문을 들어가면 너른 거실이 나오고 거실에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만 앉을 수 있는 상석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그 양쪽에 소파가 자리 잡았고 상석소파 언저리에는 흔들의자가 있어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 의자에 앉지 않았을 때는 내가 차지하고 한참을 흔들어기곤 했다. 거실의 가운데에는 벽난로가 자리했다. 벽난로 위에는 할아버지의 커다란 초상화가가 걸려있었다. 할아버지의 대략 60대쯤(?)의 얼굴이었던 듯하다. 웃고 있는 듯했지만 자애로운 표정은 아니어서 정말 우리 할아버지구나 싶었다. 오른쪽에는 창호로 된 미닫이문으로 공간을 나눠놓은 건넌방이 있었고 그 방이 우리 가족이 시골에 가면 잠을 자는 방이었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무거운 이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올달달 떨고 있으면 독일에서 온 고모가 아직까지 왜 답답하게 창문을 닫고 있느냐며 들어오셔서 창문을 열어젖히며 나를 깨울 때도 있었다. 불만이 많았지만 감히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건넌방 반대편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무시는 안방이 있었는데 건넌방보다는 작았다. 방문을 들어가면 왼쪽 끝 벽에 보료가 있었고 보료 끝에는 작은 텔레비전이 있어서 내가 시골에 가면 항상 할아버지는 그 텔레비전 30센티 앞에서 볼륨을 엄청 높이고 보고 계셨다. 그런 할아버지께 인사하면,
“누구냐!!”
“XX요!”
“누구라고?!!”
“XX요!!!”
“오 그래 잘 왔다.”
이런 대화가 늘 반복되었다.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지만, 장면은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다.
수능을 보고 난 뒤 추가합격을 기다리며 시골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학교는 어찌 되었느냐,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다 떨어진 것이 아니냐,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
나는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특별히 고민을 해보지도 않았기에 그냥 ‘다 떨어지면 재수하죠.’ 뭐라고 무심히 답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러면 독일 고모에게 이야기해둘 테니 독일에 가서 공부해라.”라고 하셨다.
그때의 나는 이 말씀을 두렵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영어도 잘 못하는데 어떻게 독일에서 공부를 할 것이며 아는 사람도 없고 친구도 없는 곳에 가서 어떻게 산다는 말인가.
영어도 못하는데 독일이라니, 고모 집이라니. 나는 단호히 거절했고, 할아버지는
“너 크게 잘못 생각하는 거야!”라며 역정을 내셨다.
그때는 그것이 내게 주어진 큰 기회였음을 몰랐다. 가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할아버지 말씀대로 독일에 갔으면 내 인생을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단지 술안주 거리일 뿐이다.
안방의 다른 문을 나서면 옷방 같은 것이 있었고 옷방과 연결된 짧은 복도를 통해 다시 거실로 나갈 수 있었는데 그곳에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 변기 옆에 당시에는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뭔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비데였다는 것을 10년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벽난로 뒤에는 주방이 있었고, 그 옆의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실이 나왔는데, 그곳에서 중학교 1학년의 나는 처음으로 고스톱을 배웠다. 배운 첫날 오광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뒷문 밖에는 큰 부뚜막과 빨간 벽돌 굴뚝이 있었다. 불이 피워지는 걸 본 적은 없지만, 그 뒤편에는 큼직한 장독대가 있었다. 고추장, 된장, 김치가 그곳에서 익어갔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산소로 가는 철문이 있었고, 그 옆의 새장에는 공작 두 마리가 살았다. 긴 깃털을 가진 화려한 공작 한 마리와 새하얀 공작 한 마리. 우리 형제는 가끔 배추를 먹이거나, 각목을 돌려 공작이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다 혼나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거의 매주 시골에 갔다. 아버지가 대단한 효자라서라기 보다는 그곳이 아버지에게는 편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시골집에 가족들을 내려두고 항상 어딘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매주 토요일이나 일요일마다 시골에 가는 것이 싫었다. 차라리 일요일에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만화영화를 보거나 친구들과 오락실을 가는 것을 더 원했다. 하지만 우리 형제에게 그런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도 막상 시골에 가면 잘 놀았던 것 같다. 곤충을 잡거나 공놀이를 하고, 산속을 헤집고 다니거나 가을에는 밤 숲에 가서 밤을 줍기도 했다. 할머니의 음식은 어린 내 입맛에는 너무 원초적이어서 잘 먹지 못했지만 강된장과 완두콩만은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벽난로에서 구워 먹는 고구마 맛은 정말 최고였다.
그곳에서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외국에 사는 사촌들이 한국에 오면 만나는 곳이기도 했고 명절이면 온 가족이 모여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기운이 허락할 때까지 산소에 성묘를 다니기도 했고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으며 어른이 되어가는 듯한 은밀한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가기 싫던 시골이, 어느새 그리운 곳이 되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시골은 큰아버지의 별장이 되었고 나는 그곳에 더 이상 마음대로 갈 수 없게 되었다. 집도 새로 지어져 옛 모습을 잃었다.
이제 그곳은 더 이상 나의 시골이 아니다.
하지만 벚꽃 잎이 흩날리던 그 길과, 고구마 냄새가 가득했던 벽난로를 떠올릴 때면 나는 마음의 벽난로에 불을 지핀다.
그 불빛 속에서 나는 아직도, 어린 날의 나와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