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의 용기

시골연작

by 각다귀

몇 년 전이었다면, 나를 업어 키웠다는 누나에 대한 애정은 그저 ‘교육된 기억’ 일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은 그런 내 생각을 바꿔놓았다.

약하디 약한 존재인 어린아이는 자신을 보호하는 사람에게 무한히 의지하고, 그것은 깊은 ‘애착’으로 연결된다. 비록 머릿속 기억에는 없더라도 그 감정은 무의식에 남아, 현재의 나에게까지 갖가지 파문을 일으킨다.


셋째 큰아버지 가족은 내가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내가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의 일인데, 그들이 이민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집에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누나가 내게 보낸 편지였다. 누나는 내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사랑한다’고 썼다.

어린 마음에 그 사랑한다는 말이 어찌나 부끄러웠던지 나는 편지를 구겨버리고 말았다. 편지를 이미 읽은 부모님이 옆에서 눈을 반달처럼 뜨고 웃고 있는 모습이 나의 수치심을 더욱 부추겼다.

그 후로도 친척들을 만나면 종종 “어릴 때 누나가 너를 업어 키웠다”는 얘기를 듣곤 했다. 큰어머니가 했다는 말이 내 기억에는 없지만, 목동 큰집의 풍경은 브라운관 TV 속 영상처럼 흐릿하게나마 떠오른다.

“xx아, 작은엄마 일해야 되니까 네가 oo 좀 봐라~”


며칠 전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발인 날 오전에 누나를 만났다. 쉰이 넘었지만 그린 듯한 동그란 눈썹은 여전했다. 고대 미인의 눈썹을 뜻하는 ‘아미(蛾眉)’의 완벽한 재현이었다. 왼쪽 머리에 꽂은 하얀 무명 핀이 어릴 때 여자아이들이 꽂던 장식과 겹쳐 보였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온 재회였지만 누나는 변치 않은 모습이었다. 누나 역시 내게 그렇게 말해 주었다. 반갑게 맞아주는 누나의 슬픈 미소가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의 파문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잔잔했다.


하지만 입관할 때, 큰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울부짖는 누나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목소리는 마치 노래하는 듯했다. 그 처연한 소리를 듣는 모두의 마음속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결국 눈물이 되어 넘쳐흘렀다.


“아빠 사랑해…

아빠 고마워…

아빠 미안해…

아빠 다시 만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길거나 짧은 삶은 계속되었다. 누나도 곧 가족들이 기다리는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엄마를 찾는 어린 나를 돌봐주고 불안해하던 나에게 사랑을 나눠준 누나에게 깊이 감사한다.

이제는 사랑을 독차지할 필요가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짧은 만남이 아쉽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아직 내 안에는 살아 움직이는 부끄러움의 관성이 남아 차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수십 년 전 미국에서 날아온 편지에 대한 답을 지금 마음으로나마 전하고 싶다.


나도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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