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캡드라이버-N.Y

사람들과 이야기

by 각다귀

2003년 7월, 뉴욕 JFK공항에 내린 나는 앞뒤로 크고 작은 배낭을 하나씩 메고 택시가 줄지어 있는 곳을 찾아 줄을 섰다. 차례가 돌아와 택시 앞에 서니 택시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리는데 그 기사를 본 순간 '퀘스트는 이미 실패다'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여행사 직원으로부터 ‘팁을 주지 않고, 택시를 타고, 무사히 유스호스텔에 체크인하기’라는 막중한 퀘스트를 난 부여받았던 차였다. 120kg은 넘을 것 같은 덩치에 에보니 빛 피부색, '헬로 써'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영화 ‘원티드’에서 주인공 웨슬리 깁슨(제임스 맥어보이 분)이 슬로모션으로 ‘쏘우뤼~~’라고 외칠 때의 묵직한 저음을 정상 모션에서도 낼 수 있다는 듯 나를 압도했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헬로'를 무심한 척 던지고 최대한 자연스레 트렁크 쪽으로 걸어가니 운전석에서 내린 그가 트렁크를 열어주며 내 배낭을 받아 친절하게도 트렁크에 직접 넣어주었다. '위압적인 모습과는 달리 매우 친절한 분이구나, 역시 외모만으로는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홀가분해진 몸과 마음을 뒷좌석에 실었다. 택시의 창문에 부착된 'no tips'라는 문구도 왠지 모를 안도감을 주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옐로캡을 탔다는 설렘, 드디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등의 배경인 맨해튼으로 간다는 흥분감에 오랜 비행의 피로도 느낄 수 없었다. 퀸스를 가로질러 이스트리버를 건널 때의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건넜던 다리가 퀸스버러교인지 윌리엄스버그 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어둑해져 불이 켜진 다리와 강물에 비친 빌딩숲 가득한 맨해튼이 보이기 시작할 때 난 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설레는 마음은 아랑곳없이 퀘스트 완료의 시간이 왔다. 캡드라이버에게 건네준 쪽지에 적힌 유스호스텔의 주소에 그는 정확히 도착했고 짐을 꺼내기 위해 택시에서 내린 내가 트렁크 쪽으로로 향하자 거구의 위압적인 목소리를 가졌지만 부드럽고 친절한 캡드라이버는 운전석에서 내려 손수 트렁크를 열고 내 배낭을 내려주었다. 외모와는 다른 그의 친절에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미터기에 찍힌 요금을 지불했다. 그리고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예의 바른 승객답게 '땡큐' 하고 숙소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리자 묵직한 저음이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tip.' '?' 검은 손등과 대비되는 하얀 손바닥을 내밀며 내뱉은 한 단어의 위력이 이렇게 강력한 것인지... 필사적으로 창문에 적인 'no tip' 사인을 가리키며 어필했지만 대충 들리는 이야기는 '내가 짐을 실어주고 내려주지 않았느냐'였던 것 같다.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것 같고, 첫 해외여행부터 현지 사람과 갈등을 빚는 것도 그리 좋은 여행객의 태도는 아닌 것 같고, 갑자기 오랜 비행의 피로도 몰려오는 것 같고, 왠지 유스호스텔 직원이 나의 체크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고, 길바닥에 택시를 오래 세워두는 것도 매너는 아닌 것 같고, 절대 팁을 주지 말라는 여행사 누나의 말도 좀 무리가 있는 것 같고, 175에 60 정도 되는 내가 190에 150은 넘어 보이는 사람과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해서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캡드라이버의 눈은 감히 마주치지도 못하고 20불 정도를 꺼내줬다. 'thank you' 'yes'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유어웰컴이라던지, 슈어 라던지, 해버굿나잇 이라던지, 킵업 굿잡이라던지는 당시로선 어림없는 대답이었다. 결국 여행사 누님이 내어준 퀘스트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합시다. 좀…)으로 끝났고 별 탈 없이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는 것만을 위안 삼으며 유스호스텔로 들어갔다.


미숙했던 시절, 경험도 없고 지식도 부족해 기준은 빈약한 논리에 기대어 얄궂기만 했던 시절의 나는 낭창거리는 마음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단호한 기준이 있었다면 기분 좋게 팁을 내거나 합리적인 금액의 팁을 지불했을 것이다. 팁을 주지 않을 요령이 있었다면 그가 내 짐에 손대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캡드라이버에 대한 기억은 당시의 내게도, 지금의 내게도 좋은 추억일 뿐이다. 그 좋은 추억이 다른 서로 연원에 기대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대문의 사진은 구글 이미지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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