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좋은 글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다르다. 누군가는 자신을 울게 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감동적인 글을, 누군가는 현학적이거나 장식적인 문체를, 누군가는 논리적으로 자신을 설득시키는 글을 좋은 글이라고 평한다. 때론 상을 받거나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글을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골라낸 '최애' 책을 한 권쯤 이야기한다.
나는 그러지 못한다. 취미를 독서라고 말하면서도,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냐고 물으면 어물거리기 일쑤다. 그건 내 오랜 성향 때문이다. 나는 문장을 본다. 나를 부수는 문장들, 내게 "너도 글을 써야만 한다"라고 외치는 말들을 찾는다. 내게 좋은 글은 단 한 줄이라도 그런 문장이 있는 글이다. 어쩌면 내가 계속 책을 읽는 이유는 나를 꿰뚫고 지나가는 문장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그렇다.
브런치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건 '작가의 서랍'이라는 이름이었다. 브런치의 인터페이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브런치에 쓰는 첫 번째 글로는 이 주제를 골랐다. 앞으로 소개할 건 내가 오래 서랍 속에 넣어둔, 어느 날의 나를 부수었던 문장들이다.
한강, 희랍어 시간
χαλεπὰ τὰ καλά.
칼레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국어에서 '빛'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p. 69)
한강의 글은 쉽지 않다. 문장이 요구하는 독해력이 높다거나, 내용이 난해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책 <채식주의자>를 읽은 날 나는 헛구역질을 했다. <소년이 온다>를 읽은 날에는 너무 울어서 저녁에 하려던 일을 포기하기도 했다. 내게 한강은 세계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가장 노골적으로 잘 써내는 작가다. 그래서 한강의 글을 읽을 때면 조금 긴장한 채로 책장을 넘기곤 했다.
<희랍어 시간>은 오랜 지인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은 소설가 한강보다 시인 한강이 더 잘 보이는 글이라는 거였다. 시적인 문체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소설과 시에 대해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문장이 있다. 소설은 자아의 세계화이거나 자아와 세계의 소통이지만, 시는 세계의 자아화라는 말이다. <희랍어 시간>은 그런 의미에서 시의 문법을 취한다. 이야기는 세계와 소통하지 않는 여자와 세계를 잃어가는 남자가 만나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의 세계, 자신이 가진 지식 그리고 자신이 겪은 일들을 곱씹을 뿐 세상에 말을 걸지 않는다. 처음에는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이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날이 저문 뒤 불빛이 번지는 것을 지켜보며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이 함께였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다. 문득 세상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수업을 마친 후 길을 따라서 걷는 동안 해가 길게 지고 어디선가 라일락 향이 나던 저녁이 있었다. 압도될 정도로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 앞에 섰을 때, 소리를 죽여 기도하는 신자들의 숨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때,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바닷물을 볼 때 나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또 목숨을 걸어 아이를 구하는 의인이나 대가 없이 타인에게 헌신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위해 모인 많은 불빛들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선한 것이고, 선한 것은 무엇보다 어렵다. 희랍인들은 그 사실을 알았기에 세 개념을 분절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이 문장을 읽은 뒤 칼레파 타 칼라(χαλεπὰ τὰ καλά.)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좋은 일은 실현되기 어렵다."라고 쓰인 해석을 보고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한강이 부러워졌다. 단순한 해석에서 벗어나,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분절되지 않았던 시대를 상상하게 하는 그의 문장력이 부러웠다.
앙드레 지드, 좁은 문
"들에 핀 백합꽃을 보라."
너무나 단순한 이 말씀이 오늘 아침 나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슬픔에 빠뜨렸다.
들판으로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입안에서 맴돌던 이 말씀은 내 마음과 두 눈을 눈물로 가득 차게 했다. 농부가 쟁기 위로 몸을 숙여 일하고 있는 텅 빈 들판을 바라보았다.
"들에 핀 백합꽃……." 하지만 주여, 백합꽃은 어디에 있습니까? (p. 195)
처음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읽었을 때, 나는 알리사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읽었던 탓도 있었고, 내가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인간이어서도 있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된 후 <좁은 문>을 다시 읽었을 때는 조금이나마 알리사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좁은 문>에 대한 서평을 보면 대부분은 제롬을 평범한 사람으로, 알리사를 엄격한 신자이자 금욕주의자로 다룬다. 하지만 알리사가 그토록 감정이 없는, 엄격하고 충실한 신자였다면 그는 슬픔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용된 구절의 전문은 이렇다. "들에 핀 백합꽃을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 내어놓은 영혼은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것으로 차려입은 자보다 아름답고 존귀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알리사는 이 백합꽃을 찾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거절하는 게 과연 쉬운 선택일까? 그 모든 순간은 그에게도 당연히 고통이다. 하나님은 알리사에게 들에 핀 백합꽃을 보라고 말하지만 알리사의 눈에는 텅 빈 들판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사랑하는 제롬과 함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음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신에게 그렇게 묻는다. "하지만 주여, 백합꽃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롬의 시선에서는 그저 냉엄하고 이성적인 신자처럼 보였던 알리사의 고통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장이다. 지드는 그렇게 숭고한 신자로서의 알리사가 아니라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알리사를, 신앙과 사랑 속에서 갈등하는 한 인간을 표현한다.
알리사를 종교에 심취해 사랑을 저버린 사람으로 해석한 서평을 읽은 적이 있다. 모든 글은 독자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그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알리사가 제롬의 손을 놓은 건 홀로 좁은 문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제롬이 좁은 문-어떤 진리-으로 가는 길을 막지 않기 위해 자신이 떠난 것에 가깝다. 신자가 아닌 나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사실 이해할 수 없기에 더 숭고한 사랑이다.
분홍이 끓기 시작할 때, 여세실
어른이 된다는 건 나의 실패를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걸까
열등감이 유일한 동력인 무렵에 현아, 우린 서로를 오독하며 돈독해지지
빨강이 되기 직전의 우리들 울음은 가장 뜨거운 울음이라고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이 시를 쓴 사람도 고등학생이었다. 그래서 처음 이 시를 마주쳤을 때, 하염없이 몇 번이고 같은 문장을 필사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대신 써준 것만 같았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한 번뿐인 시험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열등감은 우리의 유일한 동력이었다. 악과 깡만 남은 시기였다. 학교에 가면 전날까지 사이가 좋다가도 싸운 친구들이 즐비했다. 서로를 이해하며 넘어가기에는 모두가 예민했다. 우리는 서로가 라이벌이었고, 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전우이기도 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어떻게든 관계를 끼워 맞추고, 자기 자신과 상대방이 한없이 불쌍해지다가 또 열등감에 휩싸이는 때였다. 그렇게 불같은 감정들로 채운 한철이 지나갔다.
여세실이 묘사하는 분홍의 세계는 결코 낯설지 않다. 내 속에서 무수한 모서리들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듣던 밤, 살을 뚫고 올라오는 가시를 벼르던 나이. 농담처럼 모두가 자살 이야기를 했고 바람에 날리는 벚꽃잎은 맨발로 뛰어내리는 듯 보였다. 어른이 되면 나의 실패를 사랑할 수 있게 될까? 고작 한 살을 더 먹는다고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스스로 묻는 질문에는 늘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체 모를 불안감과 공포가 어깨에 늘 앉아 있었다. 어깨가 무거워 고개를 축 숙이고만 다녔다.
이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꽤 되었고, 스무 살보다 더 나이를 먹었지만 이 시를 서랍에서 꺼내어보곤 한다. 그리고 필사 노트에 하염없이 따라 적은 글씨들을 본다. 허전함을 채우려는 듯 마구 문장들을 집어삼켰던 흔적을 읽는다. 우리는 이제 자신의 실패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