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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Jun 13. 2021

올해의 목표 : 적폐 되기

올해는 정말 조졌다. 한 달이나 1분기, 상반기처럼 일정한 주기를 두고 통렬한 자기반성을 행하곤 하는데, 그마저도 코로나19 때문에 제때를 놓쳐버렸다. 한 해가 벌써 절반이나 지나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곤 허겁지겁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5초 만에 분석 결과가 나왔다. 일말의 여지도 없이, 올해는 조져버렸다.

나름대로 올해의 목표, 상반기의 다짐, 2분기의 과제 등등 지키지도 못할 리스트를 빼곡하게 구상해 두었는데 제대로 해낸 게 하나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꽁꽁 얼어붙은 취업시장에서 몸을 사리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일까. 우선과제로 삼았던 ‘이직 포트폴리오 만들기’는 직즉에 뒷전으로 미뤄두었다. 당연히 헬스나 필라테스를 비롯해 몸을 움직여야 하는 외부활동도 실행했을 리가 없었다. 코로나를 핑계 삼아 등록조차 하질 않았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이 변명이 옹졸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이쯤 되면 코로나 덕분이라고 해아 할까. 양심도 더럽게 없지, 참.

야심 차게 세워둔 올해의 목표는 ‘적폐 되기’였다. 당장 태극기를 망토 삼아 휘휘 두른 채 광화문으로 뛰쳐나가겠단 건 아니고, 그저 무언가 궤도에 오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응축한 말이었다. 지금 상태가 절대로 정상궤도라고 믿을 수가 없어서, 위쪽에 있는 무언가에 ‘으라차차!’ 하고 뻔뻔하게 올라타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이를테면 출퇴근길에 종종 마주치는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카페 주인장 관상의 젊은 남정네든(지각 걱정이라곤 전혀 없는 저 여유로운 표정을 보라!), 벌써 제 이름으로 3번째 책을 출간하곤 북토크를 연 젊은 작가든(방금 피부과에 다녀온 듯 빤질거리는 쌍판 좀 보게!), '두낫띵'을 외치면서 세상 모든 일을 해내는 듀오(일에 제대로 돌아버린 저 생산성 MAX의 멋진 또라이들!)든 그들과 비슷한 무언가가 되고 싶었달까.

하지만 지속성 있게 하는 거라곤 집에서 배나 긁어대는 게 고작이었으니 적폐로 향하는 발걸음에 진전이 있을 리 없었다. 사실 추위가 다 가시기도 전에 이미 올해는 글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곤 이따금씩 한 해의 목표를 유머코드 삼아 소비해버리곤 했다.

“제 올해 목표는 적폐 되기였는데, 아무래도 글른 거 같아요. 완전 망했어요! 히히.”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한껏 멍청해 보이는 대사를 내뱉고 나면, 어이가 없어 터져 나오는 비웃음이래도 웃음을 살 수 있었다. 하등 쓰잘데기도 없는 목표 따위로 실소라도 벌 수 있다면야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을 밖으로 꺼낼 때마다 은근한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전염병으로 인류에게 닥친 대위기의 시기에 불가항력이라는 아홉수까지 겹쳤으니까. 우주의 기운 없이 미천한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적폐행 급행열차에 탑승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내심 마음정리를 해버리고 만 거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적폐 드립으로 웃음을 동냥하고 있었는데, 이를 잠자코 듣던 (본인이 키우는 고양이를 똑 닮은) 과장님은 무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봤다. 이내 시니컬한 표정으로 맞는 말 대잔치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적폐도 적폐 나름 아닙니까. 서울에서 정직원으로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적폐가 될 수도 있고요. 누군가는 파주 씨를 적폐로 생각할지도 모르는 거죠.”

적폐 청산을 외치는 나도 누군가의 적폐라. 통수를 얼얼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북촌의 현자가 적폐의 정의를 새롭게 내린 뒤부터 웃음을 위해 올해의 목표를 팔지 않는다. 실없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대신 그나마 내가 품고 있을 자잘한 적폐의 가능성을 긁어모아 정신승리를 한다.

책상에서 고양이가 보이는 명당에서 일하고 있구나, 아침, 점심, (야근하면) 저녁까지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 맥이는 회사에 다니고 있구나, 상사에게 혼이 날 때도 경어체로 교양 있게 털리는구나, 언제 목이 댕강 날아갈 지는 모르지만 당장 오늘은 무사히 출근하고 있구나 등등. 적폐가 별건가. 잘 먹고 잘 살면 그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