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주 May 21. 2022

건강은 원 코인

나이가 들수록 옛말에 담긴 통찰에 놀랄 일이 많아진다. ‘가난과 거지는 사촌 간’이라거나 ‘하기 싫은 일은 오뉴월에도 손이 시린다’ 같은 말들. 매몰찬 시선으로 세상살이를 정확하게 꿰뚫은 격언을 만날 때마다 조상님들의 지혜에 새삼 감동하게 된다. 최근에 나를 감탄하게 만든 말은 이거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

  

나에겐 잃은 만한 거금이 없을뿐더러 명예 따위는 가져본 적도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그것들을 손에 쥐어보기도 전에 모든 것을 잃었다. 불행은 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등장한다고들 하던데 나의 불행도 꼭 그랬다. 이렇다 할 전조도 없이 어느 날 몸이 망가졌다. 너무도 순식간이라서 방비할 겨를도 없었다. 며칠 새 나의 건강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반기는 건 상쾌함이 아닌 몸의 불편함이었다. 왼쪽 어깻죽지를 짓누르는 통증은 범위를 점차 넓혀갔다. 마치 교대근무를 하는 것처럼 왼쪽 어깨에서 시작한 고통이 오른쪽 어깨로, 또 어떤 날은 뒤통수를 거쳐 이마까지 두통이 찾아오기도 했다. 비가 오기 전날 밤이면 지독한 통증이 몰아치는 바람에 애써 일기예보를 찾아보지 않고도 우산을 챙길 수 있었다.


몇 주 전에는 목을 외죄는 것 같은 인후통을 느꼈다. 괜히 이럴 리가 없는데, 하며 보건소에서도 집 앞 병원에서도 무수히 코를 찔렀지만 결과는 늘 음성이었다. 빌어먹을 ‘그 질병’에 걸린 것도 아니면서 증상이란 증상은 모조리 앓았다. 미리 쟁여놓은 진통제를 아낌없이 삼켰지만 잠시뿐이었다. 나는 이 고통이 행여 누군가에게 옮겨갈 새라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얕은 잠에서 깬 나는 인간을 움직이는 이 고통이 꼭 <라따뚜이> 속 생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킥킥거리다가 이내 찾아온 두통에 웃음을 멈췄다. 어둡고 좁은 방 안에서는 고통이 나를 잠식하는 거 같았다. 이거야말로 워킹데드가 아닌가. 잡생각과 괴로움을 오가다가 다시 선잠에 들었다.


인후통이 가신 다음날부터 내과와 이비인후과부터 정형외과와 한의원까지 부지런히 드나들었지만 신통치 않았다. 저마다 다른 약을 처방해 주는 바람에 서랍 속에는 애꿎은 약봉지만 쌓였다. 의사선생님들이 입을 모아 말한 게 하나 있기는 했다. 환자분에게 부족한 건 수면이요, 과한 건 스트레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내게 일찍 잠드는 비술을 알려주거나 스트레스를 줄이는 비약을 건네주지는 않았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찾은 건 사거리에서 가장 큰 간판을 붙여놓은 마취통증의학과였다. 누가 봐도 이상한 엑스레이 사진 두 장을 나란히 붙여놓은 의사 선생님은 왼쪽이 당신 것이요, 오른쪽이 70대 남성의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위-아래, 좌-우로  충분히 엉망이 된 내 목과 어깨를 방치한다면 곧 오른쪽 사진처럼 될 것이라고 겁박에 가까운 말을 쏟아냈다. 비전문가인 내 눈에는 그 어르신의 목이 훨씬 건강하게 보였지만 아무래도 혼나는 중인 거 같아 입을 다물기로 했다.


진단명은 현대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일자목이었다. 엑스레이를 보면 일자목이라기보다는 아수라장 모가지라고 지칭해야 마땅할 거 같았지만 잠자코 있기로 했다. 의사 선생님은 거북목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오래도록 나를 옭아매던 통증의 정체도 알게 됐다. 스트레스가 많은 탓에 목덜미 주변 근육이 단단해져 생기는 ‘근육 수축 두통’이라고 했다. 근육 수축 두통이라. 의식하고 나니 내 어깨와 목덜미에 늘상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뚜뚝뚜뚝뚜뚝. 도수치료를 받는 동안 뼈 맞추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려왔다. 내 몸을 비틀어서 내는 과격한 AMSR을 들으며 목이 사방으로 뒤틀어지게 된 원인을 곱씹었다. 아무래도 나의 지난 업보 같았다. 카메라고 노트북이고 죄다 집어넣은 크로스백을 왼쪽 어깨에만 짊어지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그렇게 혹사시킨 걸 생각하니 잘 버텨준 나의 처진 어깨가 용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거의 다 잃고 나서야 그 귀중함을 깨닫는, 아둔한 종류의 인간인 나는 요즘 들어 부쩍 건강에 대해 고민한다. 오늘은 사전에 ‘건강’을 검색했다.


건강

신체적 ·정신적·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


튼튼한 몸뚱이와 맑은 정신머리만이 건강이라 믿었건만 사회적으로까지 안녕해야 하다니. 대단한 위인이 아니고서야 세 개를 다 쟁취한 사람이 세상에 있기는 할까. ‘건강’이라는 스펙이 꼭 문무를 겸비한데다 인격까지 갖춰야 한다는, 감히 나 따위가 넘볼 수 없는 높이의 허들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내 못된 심보대로 ‘사람들은 누구나 적당히 건강하지 못하다’고 해석하기로 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덩달아 어깨의 긴장감도 줄었다. 세상에서 나만 망한 게 아니라고 믿는 것. 이따위 방법이 건강하지도 않고 더럽게 비겁하다는 사실도 알지만 확실한 위안은 얻을 수 있다.


된통 앓고 나니 덜 아픈 시간들이 귀해진다. 게임 속 캐릭터의 목숨은 그리도 귀히 여기면서 내 인생은 원 코인이라는 사실을 자주 망각하고 살았다. 밀크씨슬이나 오메가3, 강황가루 따위를 입에 때려 넣는다고 건강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이제는 알고 있다.


더이상 팔자 좋게 게으름 피울 수 없다. 오늘도 족발 같은 다리 두쪽을 이끌고 개울이 보이는 코스로 뜀박질을 하러 나선다. 한바탕 뛰고 돌아온 뒤에는 빳빳한 어깨로 폼롤러를 신명나게 굴린다. 건강을 잃으면 일이고 취미고 다 박살난다는 것을 알기에. 인생은 원 코인. 여기서 더 물러나면 정말로, 죽음뿐이다.



이전 15화 올해의 목표 : 적폐 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