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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Oct 19. 2023

의원면직

   나는 교대를 졸업한 해 가을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다. 나는 유명한 가을 덕후라서, 가을 공기가 느껴지는 그 순간부터 몇 개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다.(결혼도 가을에 했다.) 그래서일까, 첫 출근길에 집을 나서며 밖에 발을 내디딘 순간 느껴졌던 가을의 찬 공기, 바람 냄새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행복했다. 그 순간에는 더 바랄 것도, 부러운 것도 없이 기대와 희망, 설렘, 잘해보려는 의욕이 충만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채 되지 않은 어느 가을, 여기 있으면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학교’를 벗어나 다시 행복해졌다.     


  2년간 육아휴직을 하고 복직을 했다. 복직한 지 2주째 되던 날, 나는 사직원을 제출했고 사직원을 제출한 지 2주 만에 나는 학교를 떠났다. 내 인생에 사직이라는 이벤트가 있을 거라고는 살면서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무언가에 홀린 듯, 어떤 알 수 없는 강렬한 계시를 받은 듯한 느낌으로, 그동안 내 인생의 궤적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결단력을 있는 힘껏 끄집어내어 단 한 달 만에 60대 이후까지 설계되어 있던 인생 경로를 유턴했다.     



  마지막으로 학교 교문을 나서는 차에서 ‘당신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노래 모음’이라는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고, 첫 곡으로 정말 오랜만에 듣는 김동률의 ‘출발’이 흘러나왔다.      


아주 멀리까지 가 보고 싶어

그곳에선 누구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노래를 들으며 운전을 하는데 ‘와 나 진짜 저질렀구나, 교사를 내 손으로 그만두다니, 좀 멋진데? 이래도 되나? 퇴사자인 나 자신에 약간 취해있는 것 같은데? 좀 웃기기도 하고? 이거 실화?’ 하는 생각들에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슬프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받고 있던 벌이 끝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교사의 신분을 잃고 다시 전업주부 모드로 한 달 만에 아이를 내가 등원시키는 첫날, 기분이 이상했다. 친구들과 퇴사파티를 해야만 할 것처럼 엄청 신나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하고, 무언가 허전한 느낌도 들었다. 빈 유모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놀이터에서 돌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아기들을 아기띠로 안은 엄마 세 명이 명절에 시댁에서 있었던 일을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는 걸 보았다.


  순간 ‘전업주부들의 모닝 수다-아, 이것이 전업주부의 생활인가, 아니지 저분들은 무슨 일을 하다 그만뒀을까, 나랑 00쌤은 아침에 주차장에서 만나자마자부터 맨날 학교 욕했는데 여기선 시댁 욕하네, 그나저나 학교는 지금 벌써 1교시 끝났겠네’ 하는 생각들이 그 짧은 시간에 꼬리를 물었고, 이런 걸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상황이 아직도 실감이 안 나면서 재미있었다. (전업주부나 워킹맘을 구분하거나 특정 집단을 안 좋게 말하려는 게 아니라, 정년보장이 되는 직업을 갖고 살면서 생각해 볼 일이 거의 없었던 ‘전업주부로서의 삶’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전업주부가 된 첫날 아침에 마침 우연히 마주한 하나의 자극이었다.)


  휴직 중일 때에도 놀이터에서 얘기 중인 엄마들은 매일 차고 넘치게 봤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휴직자 신분일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난 앞으로 어떤 사람들과 어떤 대화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될까, 난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게 될까, 내 남은 인생을 위해 오늘은 뭐부터 준비해야 할까, 오늘은 당분간 읽을 책 좀 골라볼까, 그럼 일단 뭐 해 먹지…. 인생의 중대한 고민인 듯, 백수의 행복한 고민인 듯 경계에 걸친 생각들을 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흘러 교사가 아닌 다른 모습과 삶의 방식으로 정착한 내가 과거를 회상할 때 유난히 선명히 기억날 것 같은 하루였다.


          

  의원면직을 결정하기까지 수많은 밤 아이를 재우고 남편과 울고 웃으며 대화하면서, 처음으로 사직원 양식을 직접 구경해 보면서, 교감실에서 사직원을 자필로 한 글자 한 글자씩 써내려 나가면서, 마지막 짐을 학교 주차장에 있는 차에 싣고 시동을 걸면서 내 머릿속을 채운 생각과 감정은 지난 교직 생활의 추억 회상도, 교직을 떠나는 아쉬움과 미련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아니었다.


  그저 용기가 없어서 좀 더 빨리 관두지 못한 '후회'였다.


  그래도 거의 십 년을 몸담은 나의 첫 직장인데, 인정도 받고 사랑도 받고 단단해지고 성장했던 고마운 곳인데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확신이 생겼다.

  내가 선택한 지금 이 길이 나한테는 맞는 거구나.


  앞으로 누군가에게 “왜 그만뒀어(요)?”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내가 뭐라고 답할까 생각해 보았다.


  요즘의 수많은 교사 관련 이슈와 집단 우울증에 빠져버린 듯한 교직 사회 분위기였나.

  휴직 기간 동안 풍문으로만 들었던 코로나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학생들과 학부모들이었나.

  공무원 조직 특유의 과도하고 불필요한 행정 업무였나.

  아니면 첫 워킹맘 생활의 버거움이었나.

  당연히 다 복합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행복하지가 않았다. 항상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당한 채 앞으로 30여 년을 더 할 자신이 없었다. 이곳은 나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내가 진짜 좋아하고 잘 맞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나에게 있어 ‘교사’는 부모님, 배우자, 자녀에게 최고의 직업이었다. 교사 본인만 빼고.


 ‘그만둘까?’ 하는 고민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만두겠다, 때려치우겠다는 말은 다른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이, 아니 내가 느끼기엔 교사들이 더 많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더라 류의 말을 덧붙이면서). 나 역시도 항상 ‘언제 밥 한 번 먹자’와 같은 한국인들의 입에 달려있는 흔한 인사말처럼 ‘그만둬야지’, ‘정년까지는 절대 못하지’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이걸 복직 후 한 달 내에 빠르게 실행에 옮기게 된 계기가 뭐였을까.


  남편과 그동안 의원면직 관련해 오랫동안 진지하게 대화하면서, 매일 출퇴근길에 정말로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꼭 죽음이 코앞에 닥친 사람처럼 나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길었던 생각과 의식의 흐름을 기록해두어야 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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