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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Oct 19. 2023

수학을 못해서 교대에 갔다

  내가 학생일 당시 교사라는 직업의 사회적 위상은 상당히 높았다. 꿈이 교사인 친구들도 꽤 많았고, 성적이 좋은 학생들 중 명문대를 버리고 교대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많았으며, 특히 대부분의 여학생 부모님들의 오랜 꿈은 교사였다. 나는 100% 타의에 의해 교대에 진학한 케이스인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선택이었을까를 생각해 보다 자연스레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말로 하기에도, 글로 쓰기에도 약간 재수 없지만, 어린 시절을 돌아보자면 나는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어른 같은 말도 엄청 일찍 했고, 글자도 빨리 읽었다. 무언가를 배울 때 습득력이 좋았다. 또 동네에서 유명한 책벌레였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한 번 빠져들면 옆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듣지 못했다.

  그 당시엔 초등학교 때 한 달에 한 번씩 다독상을 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학년 부장이나 업무담당자인 듯한 선생님이 교실마다 앞문을 열고 불쑥 들어와 ‘얘들아, 너희 반에서 누가 책 많이 읽어?’라고 하면 우리 반 친구들이 항상 ‘000요~~~’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그런 아이였다.


  한 번은 항상 가는 동네 책방에 모여있던 아주머니들이 내가 들어가자 ‘쟤가 책을 그렇게 빨리, 많이 읽는다더라.’하며 수군대더니, 갑자기 책 한 권을 꺼내 나에게 주며 1분 동안 읽고 무슨 내용인지 말해달라고 했다.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페이지를 읽었지만 갑자기 시험에 처해진 상황이 어린 마음에도 불쾌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들은 ‘봐봐, 그냥 책장만 넘기는 거네.’라고 했던 일화가 생각난다.


  어쨌든 동네 아줌마들이 테스트를 해볼 정도로 책을 많이 읽는 아이로 소문이 났고, 실제로 책을 정말 많이 읽어 어휘력이나 문장력, 독해력이 길러졌다. 자연스럽게 작문에도 소질이 있었고, 크고 작은 글쓰기 대회에 나가면 무조건 1등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해리포터 광풍이 불었고, 흔한 해리포터 덕후 및 책과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조앤 롤링처럼 언젠가 큰 거 하나 써서 인생역전하는 꿈을 마음속에 품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엄마는 내가 일기 대신 지었던 꽤나 많은 시들을 모아 출간을 하려 하기도 했었지만 주목받고 나서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내가 반대해서 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컴퓨터 대회, 과학 발명 대회, 그림 대회, 대운동회 계주 선발까지 나가기만 하면 1등을 했다. 내 인생의 리즈 시절은 무조건 초등학생 때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다.


  우리 엄마는 은행원이었다가 나를 낳고 전업주부가 되었는데, 그 당시에 보기 힘든 자녀 교육에 깨어있는 열혈맘이었고, 요즘 영유아교육 시장에서 난다 긴다 하는 인플루언서들을 보면 코웃음이 날 정도로 그 시절에도 요즘 핫한 아이의 감정 읽어주기, 훈육, 엄마표영어, 엄마표독서 등을 정석으로 해냈던 슈퍼맘이었다. 우리 엄마가 지금 육아서를 썼다면 초 대박이 났을 텐데.


  우리 부모님은 아웃풋에 집착하거나 강요한 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다양한 소스와 환경을 끊임없이 새롭게 제공해 주신 덕에 나는 다양한 경험을 하고 다양한 분야의 것들을 배워볼 수 있었다.

  도서관과 동네 서점에 출석 도장을 찍으며 몇 시간씩 쪼그려 앉아 같이 책을 읽고, 그 옛날에 영어 원서 서점에 손잡고 같이 가서 재밌게 읽었던 한글책의 영어판을 사들고 오고, 각종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싱어롱 비디오가 집에 항상 구비되어 있었고, 어린이 사회과학 잡지를 구독하고, 학원, 문화센터, 방과 후 프로그램은 '찍먹'수준으로라도 종류별로 거의 다 해봤다.(심지어 판소리 문화센터도 잠깐이지만 다녀 봤던 기억이 난다.) 주말에는 집에 있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캠핑이나 여행을 다니고, 시골 할머니댁에 가서 자연 속에서 뛰어놀고, 전국 방방곡곡의 박물관이나 과학관은 다 가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휴일 없이 육아했던 우리 엄마, 아빠 정말 존경스럽다.)


  이것저것 다 경험해 보고 웬만한 건 다 어느 정도로는 할 줄 아는 수준. 이렇게 문자 그대로 슈퍼 제너럴리스트로 키워진 나는, 교대에 온 건 싫지만 그나마 초등 수준에서 이것저것 다양한 걸 가르쳐야 하는 교대에 썩 잘 맞긴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교대, 교사와 잘 맞는 건 아니었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실제로 교대에서 내가 성적을 잘 받았던 과목은 딱 두 종류뿐이었다. 예체능, 그리고 에세이를 써서 학점을 받는 과목들이었다. 초등 00 교육학개론, 초등 00과 교육방법론 등의 과목에서는 좋은 학점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중학생까지 전 과목을 골고루 두루 잘하던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삼각비 단원을 만나며 무너졌다. 사인, 코사인, 탄젠트에 발목 잡힌 내 인생! 그동안 어떤 과목의 어떤 새로운 개념을 배워도 이해가 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삼각비라는 것은 내 뇌를 완전히 고장 내 버린 것만 같았다. 깔끔하게 이해가 되지 않은 채 찝찝한 상태로 시험을 보고, 인생 처음으로 60점 이하의 점수를 받았다. 그 일은 고등학생이 되어 나를 수포자로 이끄는 데 크게 일조했다.


  어렸을 때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한 덕분에, 또 영어 원서와 영어 비디오를 끼고 살았던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내신의 국어와 영어 과목, 수능의 언어영역과 외국어영역은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아도 항상 만점 근처에서 1등급을 받았다. 내신 시험의 국어 과목들은 문이과 통합 단독 석차 1등을 자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비교하면 수학은 처참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4점짜리 주관식 문제를 6개 정도 풀지 못하거나 찍고 시작했다. 모의고사를 보면 매번 언어 98점, 수리 72점, 외국어 100점 식의 V자 형태의 점수가 나왔다. 나는 상위권 학생들을 모아둔 ‘심화반’에 속한 학생이었음에도 정규 수학 교과 수준별 이동 수업에서 A, B, C반 중 B반에 내려간 적도 있었다. 그때는 성적순 명렬표를 교실 앞에 붙이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절이었어서, B반 명단에 내 이름이 쓰인 종이가 3개 반 교실 앞에 일주일 동안 붙어있었을 때 느꼈던 창피함과 좌절감은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 내 꿈은 변호사였다. 로스쿨 제도가 막 시작되던 때였는데, 수학에 젬병인 나는 경영학과를 제외하고 사회과학부, 자유전공학부, 인문학부 등에 진학하고 싶었다. 얘는 수학만 아니면 정말 최상위 학교의 최상위 학과를 갈 수도 있을 텐데 하며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시며 수학 공부를 푸시했다. 나도 너무나 수학을 잘하고 싶었다.


  고3이 되고, 내 수학 성적은 더 떨어졌다. 수학에 올인하기로 했다. 언어영역과 외국어영역 문제풀이를 중단하고, 하루종일 수학만 했다. 그랬더니 60~70점대였던 수학이 70점대 후반~80점대 초반으로 오른 대신, 언어와 외국어가 조금씩 떨어졌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시간과 체력은 없는데 할 게 점점 더 늘어났다. 여름방학에 배수진을 쳤다는 마음으로 독하게 수학을 팠더니 수능에서 수리영역 90점대를 이룩해 내었다. 언어와 외국어는 평소 점수보단 둘 다 떨어졌지만, 다행히 1등급은 받았다. 종합하면 평소보단 좀 아쉬운 성적이었지만, 수학에서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성공이었다.


  하지만 최상위권 성적으로는 애매했다. 선생님들과 엄마는 이 점수로는 차라리 교대에 가라고 했다. 네? 제가요? 지금요? 여기서요? 갑자기요? 갑자기 툭 튀어나온 교대라니? 나는 그동안 내가 교대에 가려고 이렇게 공부한 줄 아냐며 극구 거부했다.

  나는 중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하는 과정을 거치며 중학교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학교급의 선생님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른 무서운 줄 모르고 예의 없이 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상위 학교의 최하위 과에 가는 것도, 어중간한 학교의 최상위 과에 가는 것도 딱히 완전히 끌리는 선택지는 없었기에, 재수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3년 내내 사설 모의고사 희망 학교 지원란에 단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던 교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때는 내가 뭘 잘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를 때라 여자 직업으로는 교사가 최고라는 선생님들과 엄마의 말에 순응했던 것 같다. 만약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은 바로 저 때다. 그리고 교사가 된 후 6학년 담임을 맡을 때면, 수학 시간에 제발 너희들은 수학 열심히 하라고, 나중에 중학생이 되면 삼각비라는 단원이 나오는데 거기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자조적인 농담을 종종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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