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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ameLee Dec 04. 2022

매력적인 악인은 입체적이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창업을 시작한 후, 이전보다 책을 읽지 않게 됐다. 회사를 다닐 때는 지하철에서 짜투리 시간에 책을 읽는 루틴을 가져갔었다. 하지만, 창업팀 사무실이 집 근처에 있다보니, 뚜벅이 메타로 출근을 했고 자연스레 책과 멀어졌다. 책을 루틴으로 가져가는 환경을 만드려고, 지난 주부터 북 인증 스터디를 운영했고, 다행히(?), 아침 루틴으로 꾸준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성장을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데미안>이란 책으로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다. 책 중에서 고전문학 소설류를 좋아하는데 책을 읽다보면 인간, 그 자체에 고찰을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는 능력을 더 길러볼 겸, 독후감을 남긴다. 매우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책 : 싯다르타
저자 : 헤르만 헤세
출판사 : 민음사
아침 8시에 독서를 인증하고 있다. 안 하면 벌금임!






<데미안>의 압락사스,
<싯다르타>의 단일성

 <데미안>을 먼저 읽은 사람이라면, <싯다르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데미안>과 흡사하다고 느낄 수 있다. <데미안>에서 “압락사스”라는 신이 등장한다. 압락사스는 신성과 마성, 선과 악, 남성과 여성과 같이 서로 양극단에 있는 속성을 한 번에 갖고 있는 신이다. 우리는 특정한 대상을 규정할 때, 상반대 되는 속성이 함께 존재할 수 없음을 전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어떤 사람을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동시에 그 사람은 “선한 마음”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헤르만 헤세의 두 작품 (출처 : 민음사)


<데미안>의 압락사스라는 존재는 세상을 바라보는 양극단적인 시선에 돌을 던진다. 즉, “상반대 되는 속성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라는 관점이 그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 뿐이며, 실제로 함께 존재할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더 나아가, “데미안”이란 인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우리의 기준으로 정의내라고 말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아브락사스(압락사스)의 모습 ( 출처 : <아트인사이트> )


 <싯다르타>에서 “단일성”이란 개념을 통해 특정 대상의 본질은 하나의 시선으로 정의를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길가의 바닥에 있는 돌은 “현재”의 시선으로 봤을 때, 명백히 돌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돌이 부셔지고 흙이 된다면? “미래”의 시선에서 이는 돌이 아닌, 흙이 된다. 이처럼, 같은 대상은 “현재”, “미래”의 시선에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하나의 시선으로 대상을 정의하는 건, 그 대상의 본질과 오히려 거리가 멀어지는 행위다. 이 단일성이란 개념은 시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데미안>의 “압락사스”처럼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신성과 마성도 모두 양극단에 묶힌 시선에 속한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는 말은 악이란 시선에서 대상을 정의하는 행위다.

중립 기어 박아라! ( 출처 : <에펨코리아> )






매력적인 악인은 입체적이다.

악인이 등장하는 영화 중에서 특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영화를 봤을 때, “악인이 입체적이다”라는 평가를 내린다. <싯다르타>에서 등장하는 단일성의 개념을 가장 쉽게 풀어낸 말이 아닐까 싶다. 악한 사람이지만 그의 악함이 이해가 되며, 결국 미워할 수가 없고, 공감하게 된다. 즉, 매력적인 악인은 악함과 선함, 모두의 특성을 지닌 존재다.

우리는 조커의 서사에 공감한다. ( 출처 : <조커>)


 영화에서 느낀 “입체성”을 현실에서 만큼 느끼기 힘들다. 영화는 악인에 대한 이야기를 수차례에 걸쳐 전달하기에, 결과적으로 악인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생긴다. 그리고, 이 정보를 종합해 악인의 선과 악, 모두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바라본 대상의 정보는 “현재”의 시선에 한정된다. 그렇기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영화보다, 현실에서 대상을 더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현실의 빠른 흐름 속에서 정보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시간이 영화보다 훨씬 적을 수 밖에 없다.

단편적 정보 (출처 : <@pet_foolery)





결국 우리가 선택한다.

양극성, 단일성 모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관점은 가치중립적이며, 이 관점에 가치를 부여하는 건 우리다. 누군가는 양극성이란 방식이 옳을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단일성이란 방식이 옳을 수 있다. <싯다르타>에서도 주인공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서로 다른 친구도 옳다고 말을 한다. 다만, 어떤 방식을 선택할지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무지성으로 방식을 선택하면 안 된다. 자신을 돌아본 끝에,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데미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지성이 되면 안 된다. (출처 : <진격의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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