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듈락(Edmund Dulac),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 1911)>
어느덧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고 인어공주는 아름다운 색깔의 물거품에 쌓여 바다 위로 떠올랐어요.
2024년 7월 13일 아침 7시 강원도 삼척시 맹방 해변
새벽 어스름이 걷혔는데도 사방이 뿌옇다. 빼곡한 해무 몇 겹 뒤로는 곧장 바다지만 분간이 잘 되지 않을 정도. 이대로라면 오늘 주요 일정은 즉시 종료다. 계획대로라면 제13회 '삼척이사부장군배 바다수영대회'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됐어야 한다. 대회명이 적힌 현수막을 눈으로 훑으며'신라 장군 이사부우-' 하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노랫말을 속으로 몰래 흥얼거리다 나도 모르게 김이 빠져 그만두기로 한다.
"아아, 에, 짙은 해무로 구명보트를 띄울 수 없어 경기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바닷물을 끼얹고 몸을 달구기에 한창이던 제1경기 선수들이 저마다 크고 작은 탄성을 쏟아냈다. 제자리걸음에 맞춰 툴툴 털던 손발은 움직임을 멈췄다. 조여오던 숨통을 틔우기 위해 걸치고 있던 웻슈트 지퍼를 내려 등을 드러내거나, 허리춤까지 벗어 내렸음은 물론이다. 오픈워터용 웻슈트는 물 안에서라면 잘 뜨고 체온을 유지하기에 제격이지만 물 밖에서는 그저 한여름에 껴입은 고무장갑과 다를 바가 없다. 잘 늘어나지 않고 몸에 꼭 달라붙어 답답하고 통풍이 되지 않아 덥다. 한데 입기도, 벗기도 힘드니 모두 벗어던지기는 또 아까워 어쩔 수 없이 택한 방편이었다.
주최 측의 공식 상황 설명을 들은 우리는 모래사장에 늘어놓은 초록색 발포 돗자리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가까운 미래를 점쳤다. 정 안 되면 우리끼리 물놀이하고 먹고 마시다 가는 거지, 하며 누군가가 최악(?)의 점괘를 내놓았다. 빨간 고무 대야에 꽁꽁 얼린 생수병과 함께 재워둔 맥주캔 표면을 따라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긴 원피스를 벗어던지면 그대로 수영복 차림이라 바다로 곧장 뛰어들기에도 좋았다. 최악이래 봤자 나쁠 게 하나 없는 완벽한 미래.
"에라, 모르겠다."
몇몇은 벌써 캔뚜껑을 따서 맥주를 들이켰고, 입가에 묻은 거품을 손등으로 닦으며 웃었다.
"그러다가 입수 전에 음주 측정하면 어쩌려고 그래?"
"우리 시합은 어차피 오후까지 한참 기다려야 할 텐데, 한 모금씩만 마시면 되지."
와, 시원하겠다! 나는 부러운 눈길을 던지며 배가 고픈 것도 아니면서 삶은 계란 껍데기를 깨부수고 찐 단호박을 쪼개며 심심한 입을 달랬다. 바다수영 경력자들이라면 몰라도, 나 같은 초심자가 음주 수영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다. 사람들이 긴장을 느끼는 순간에 오히려 차분해지는 나로서는 적당한 포만감에 눈이 감겼다. 안 되지, 안 돼. 몰려오는 졸음을 쫓으려 여기저기를 쏘다녀볼까 싶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의 끝은 물거품
바다수영 대회에 나가겠다고 작정하면서 자주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떠올렸다.
한글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일곱 살, 유치원 책꽂이에서 고 녀석을 뽑아 들었다. 파도가 출렁이는 바닷물, 초록으로 일렁이는 해초, 줄무늬가 있는 물고기, 반짝이는 모래, 시옷(ㅅ) 모양으로 둥글게 말린 인어의 꼬리.... 이 예쁜 그림들을 삭삭 넘기자 종내에 주인공인 막내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때만 해도, 모든 책은 마지막 장을 덮으면 두피가 삐쭉삐쭉해지고 마음이 웅장해지는 줄로만 알았었지. 어리석은 순수여! 나는 인어공주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불편한 결말로 맺어지는 이야기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나도 재미없어. 책꽂이에 다시 책을 꽂은 나는, 친구들과 미끄럼틀 아래로 숨어 들어가 소꿉장난에 껴들었다.
한참 나이를 먹고서도 물거품이 피어오르는, 이 뜨악한 장면을 잊지 못했다. 주인공이 언제까지나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결말을 원해서인 건 아니었다. 다만 이런 의문이 일었다.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는 장면은 지독하게 잔인하면서도 어째서 아름다운가.... 그렇다. 나는 이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생에서 삶이 고단할 때마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상상을 했던 것이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였으니까 꽤 유서 깊은 몽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처럼 뿔뿔이 흩어져 바닷물과 뒤섞여 하나가 되면 어떨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그렇게 물거품이 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