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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발 Oct 08. 2024

버티는 자가 결국 맨 앞

오랜 기다림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까


에드먼드 듈락(Edmund Dulac),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 1911)>


우리는 바다 바닥이 노란 모래밭일 거라고 상상하지만, 그곳에서는 신기한 꽃과 식물들이 자란다. 식물의 줄기와 잎들은 어찌나 유연한지 물살이 조금만 일어도 살아 있는 것처럼 살랑거린다.



'바닷물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시작은 꽤나 단순했다. 따뜻한 바다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물고기를 보고 싶어서 수영을 배우기로 한 거니. 알록달록 무늬가 그려진 크고 작은 물고기 떼가 온몸을 유연하게 흔들며 몰려다니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건 어떨까? 고작 산호초 사이를 이리저리 능수능란하게 헤엄치는 물고기가 뭐라고, 싶으면서도 물속 유혹은 오래도록 꺾임이 없었다. 밥 먹기보다 쉽다는 이유로 꼬박꼬박 챙겨 먹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겁이 많다는 게 매번 수영을 망설이는 변명거리가 됐다. 그러다 물에 둥둥 뜨는 구명조끼를 입고 워터파크를 서너 시간 돌며 종횡무진하면서 수영 강습 정도는 거뜬(?)할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확신이 생겨버렸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초보반 시절 기억은 가물가물하니 속도를 좀 내서 얘기해 보겠다. 매일 물을 먹고, 묵직한 배를 통통 두드리며 집에 돌아오는 게 그 시절 저녁 일과였다. 물은 유연하고 부드럽고 물렁물렁할 거라는 편견이 그즈음 간단히 박살 났다. 간신히 엎드려 뜨기가 되었는데, 누워 뜨는 건 또 되지 않았다. 잔잔하던 수영장 물에 몸을 담그면, '쿠구궁, 콰광, 쿠구궁, 푸슈슈슉' 하며 재난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이 시끄러워졌다. 눈과 코와 입과 귀, 그러니까 얼굴에 난 구멍이란 온갖 구멍으로 락스 냄새 진동하는 물이 파고들었다. 살아보겠다고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머리 집어넣으세요!" 하고 선생님이 소리쳤다. 살기 위해 팔다리를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맘만 먹으면 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깊이(1.2m) 임에도 어쩜 그렇게 물이 두려운지....


당시에 난 징글징글한 야근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강습에 빠질 일이 자주 생기자 결국 아침반으로 옮겨야만 했다. 여기에 출장까지 늘어나 마침내는 한동안 수영을 중단해야 했다. 그러다가도 퇴사는 할지언정 다시 연어처럼 수영장 물을 거슬러 그 자리에서 헤엄쳤다. 그랬더니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을 모두 구사할 수 있게 됐다. 레인 끝에서 끝으로 겨우 허우적거리던 몸은, 이제 25m를 지나면 유유히 벽을 박차고 다음 25m를 더 나아갈 준비를 할 수 있게 됐다.


수영장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초보 딱지를 간신히 떼니, 내가 그 레인의 맨 앞자리에 서 있었다. 어떡해서든 정해진 시간에는 물 안에 있었을 뿐인데 그중 제일 빠른 사람이 돼버린 거다. 수영장에서도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평범한 법칙이 적용된다. 무슨 수를 써서든 오래 버티는 자가 결국 맨 앞자리에 선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그 레인에서 버티며 1등을 독차지할 수는 없겠지만(이 이야기는 나중에 조금 더 할 수 있겠지). '열심히'나 '잘' 같은 부사를 데리고 다니지 않아도 시간은 우리를 보다 나은 곳으로 끌어올린다. 정말 다행이지 뭔가.



인어공주가 바다 위로 나갈 수 있는 나이, 열다섯


막내 공주는 바다 위 인간 세계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며 동경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그곳에 속한 생명이 주는 익숙함은 결코 어떤 장황한 이야기나 서사가 될 수 없다는 증명처럼. 그는 호기심과 동경에 동반하는 동화 주인공의 숙명을 받아들이며 열다섯 살 생일이 올 때까지 버텼다(내가 수영장에서 그럭저럭 버티며 떠다녔던 것과 비슷할까?). 이런 오랜 기다림은 어떤 강력한 열정을 만드는 듯하다. 이 강력함은 주인공을 보다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산산조각 나는 방향(이를테면, 물거품이 되는 쪽)으로 몰아붙인다. 결론이 이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열정은 부러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차차, 이 얘기를 빼놓을 뻔했다. 그래서 바다에 들어가 물고기들을 보았냐고? 물론이다! 코타키나발루, 괌, 호이안 같은 섬을 돌며 물살에 몸을 맡기고 느긋하게 유영하는 물고기를 여러 번 구경했다. 질리지도 않는 어여쁜 생명들. 바다에는 그냥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주는 것들이 있었다. 인간과는 다른 어떤 종이 어마어마하게 큰 얼굴을 들이밀며 지구를 향해 눈을 깜박이면, 그들 눈에는 나도 그런 감동적인 존재로 보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근데 물고기도 볼 만큼 봤으면서, 왜 나는 아직까지도 수영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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