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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발 Oct 09. 2024

167센티미터 머들러

매일 같은 시각, 은밀하게 진행되는 촉감놀이

바스티앙 비베스(Bastien Vives), <염소의 맛(Le Gout du Chlore), 2008>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이면 넓은 대리석 계단을 내려와 차가운 바닷물 속에 발을 담갔다. 그러면 타는 듯이 뜨거운 발이 시원해지고...



눈물이 쏙 들어가는 염소의 맛


분명 아침 7시에 수영 강습을 들었는데, 같은 날 밤 9시에 다시 수영장을 찾는 날들이 있었다. 사무실에서 꾸역꾸역 참았던 눈물이 혼자 남겨진 밤이면 멈춤 없이 콧물과 함께 줄줄 흐를까 걱정돼 곧장 집으로 가지 못해서다. 회사에서 울면 많이 모자라 보인다. 본체인 찐따, 지질이의 본분에는 집에서나 충실하자. 참자. 시큰거리는 눈을 부릅뜨며 가까스로 수영장에 도착해 그날의 세 번째 샤워를 마치고 입수한다. 물을 가볍게 달리며 달궈질 때까지 온몸에 들이부어지는 차가운 촉감. 그제야 눈에서 힘이 빠지고 점점 가빠지는 호흡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언젠가 어떠한 이야기에도 결코 충분히 빠져들 수 없던 때가 있었다. 그 좋아하는 책도 못 읽고, 영화도 볼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결론지을 수 없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단상이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올라 몰입을 방해했다. 이야기광인 나는 이 어둡고 긴 터널을 온갖 일러스트레이터와 웹툰 작가를 찾아 헤매며 견뎠다. 특히 마스다 미리(益田ミリ)와 바스티앙 비베스(Bastien Vives)의 단순한 그림 안에 녹아있는 삶의 단편들이 좋았다(글자가 별로 없다는 점이 특히).


바스티앙 비베스의 책 중에서도 <염소의 맛>을 제일 여러 번 봤다. 척추옆굽음증이 있는 남자 주인공이 재활을 위해 찾은 수영장에서 로맨스도 덤으로 찾는 예쁘고 귀여운 그림책(?!)이다. '애들 오줌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들 각질 맛도 나름 좋아'하는 그가 매주 수요일 그토록 기다리는 '염소의 맛'. 그래, 분명 물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몸도 마음도 물에 들어가기 전보다 한결 산뜻해진다. 엄마 배 속에 들어가 있을 때처럼 축축하고 부드럽고 시끄러워서일까?



인어공주의 특별한 밤 사생활


마녀에게서 약을 얻고, 인간이 되어 왕자와 함께 살게 된 인어공주는 깊은 밤이면 몰래 나와 차가운 바닷물 속에 발을 담갔다. 원래는 지느러미였던 자리를 기억하듯 뜨거운 발을 식히기 위해서였다. 뜨거운 머리와 가슴을 식히기에 물 만한 게 없다. 말캉하고 아주 거대한 슬라임 덩어리에 뛰어들기. 부드럽고 몰랑몰랑한 말랑이 인형에 둘러싸이기. 흙가루처럼 보드랍고 깃털만큼 매끄러운 물에 피부를 문지르기.... 나는 매일 같은 시각, 물에 몸을 맡기고 온몸 구석구석 이렇게 은밀한 촉감놀이에 집중한다. 167센티미터 길이의 머들러가 길이 25m, 높이 1.2m의 컵 안에서 뱅글뱅글 회오리친다. 눈물이 쏙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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