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밖에 없어. 받으려면 받고, 말라면 말어.
우리 엄마는 네고왕이었다. 어렸을 때 나를 데리고 간 시장에서 단 한번도 제값을 주고 물건을 구매한 적이 없었다. 네고의 레퍼토리는 차고도 넘쳤다. 우리 버스타고 왔는데 차비만 빼주면 안될까? 어휴 나 대학생 둘 키워서 돈이 하나도 없잖아. 이것봐 나 정말 지갑에 이것만 넣고 왔다니까? 그때마다 민망함은 나의 몫이었다. 네고도 어찌나 대담하신지. 저쪽에서 5만원을 부르면 대뜸 2만 5천원을 부르는 식이었다.
엄마아... 왜 그래애... 내가 다 민망해서 얼굴이 빨개지면 만만치 않은 상인 아주머니도 대차게 응수했다. "어휴 나 그렇게는 못팔아. 뭐 남는게 있어야지!" 아무리 엄마라도 이건 너무 심했다, 엄마가 진거다... 싶을 무렵... 엄마는 필살기 신공을 내뿜었다. (물건을 가져가고 돈을 가판 위에 놓으며) "이것밖에 없어 진짜. 받으려면 받고, 말라면 말어."
백전백승. 한번도 실패한적이 없는 엄마의 필살기였다. 돈과 물건의 완벽한 교환. 상인의 감각으로 물건을 가져가고 돈을 내놓는 고객에게, 다시 돈을 내어주고 물건을 가져가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엄마는 정확히 그 지점을 캐치했다. 그리고 정말 말도안되는 가격으로 물건을 구매했다.
엄마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늘 창피함과 함께 어떤 경외감이었다. "엄마... 진짜 짱이다... 근데 매번 어떻게 그래? 저 쪽에서 안된다고 하면 어쩔라고?" 그럴때마다 엄마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안되면 안되는거지 별 수 있냐. 그런데 샀잖아."
7만원 같은 5만원짜리 주시면 안돼요?
그리고 오늘 지인에게서 웬일인지 낯설지않은... 우리엄마급의 네고왕의 향기를 느꼈다. 때는 렌즈를 사러 간 안경점에서였다. 5만원 짜리 있고, 7만원짜리 있고... 가격을 설명하는 사장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지인은 애교있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사장님~ 7만원같은 5만원짜리로 주시면 안돼요?"
허... 순간 너무 놀라서 얼어붙었다. 아니이이 여기가 무슨 시장도 아니고오- 이사람이 갑자기 왜 이래애- 민망하게에. 속으로 안절부절. 이 말을 삼키면서 사장님의 얼굴을 지켜봤다. 2-3초간의 정적. 그러나 곧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장님이 웃으시며 "아유 그럼 이번에만 좋은걸루 해드릴게요." 라고 대답한 것이다.
띠용...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서비스로 받은 렌즈세척기까지 내 손에 들린 채였다. 나는 안경점을 나오자마자 지인에게 엄지를 치켜 세웠다. 와...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러우세요? 지인은 안되면 할 수없지만 말은 건네볼 수 있는거 아니냐고 했다. 와씨... 이 사람 뭐지? 존멋인데?
겁나 멋있어 진짜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라는 책이 있다. 와튼스쿨 MBA의 설득수업이라나 뭐라나. 그런데 그 책의 내용이 오늘 엄마와 지인에게서 본 것과 다르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요구할 것. 어떻게 이런 것까지 달라고 하지, 싶을 정도의 것을 요구할 것. 그러면 의외로 '요구하는 것' 만으로 그것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이론과 실제는 다른것이어서... 그걸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그런데 엄마와 지인은... 그 책과 무관하게 이미 삶에서 완전히 체화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조빱이어서 '요구하라 아님말고' 라는 간단한 진리를 실천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창피함이 그득했던 10대 시절과는 달리 나는 이제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강수를 두는 정도의 배짱,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치고 들어가는 능수능란함, 원하는 것을 얻은 후에 감사함을 표하는 예의. 하나도 놀랍지 않은 것이 없다. 와 정말... 어떻게 저러지? 질색팔색을 하다가도. 이내 벌개진 얼굴을 하고 중얼거린다.
참나. 창피하지도 않나.
근데... 존나 멋있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