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직을 찾은 거 같아
20대의 어느 날. 나는 친구를 부여잡고 기쁘게 말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사에 입사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뭘 해야 하지, 뭘 해야 행복할 수 있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직장인은 안중에도 없었다. 작가가 돼볼까. 그래도 영화감독이 꿈이었는데. 돌고 돌아 나의 선택은 다큐멘터리 PD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 이것만큼 완벽한 직업도 없을 거야. 그때는 그랬다.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너무 힘들어서 죽을 거 같아
다시 20대의 어느 날.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천직인 줄 알았던 다큐멘터리 제작일은,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하루 3-4시간의 수면시간. 매일매일 선배에게 듣는 폭언. 100만 원도 안 되는 월급. 그 시절의 나는 한없이 우울하기만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조연출을 그만두던 날, 나는 바로 위 선배와 크게 싸웠다. 두 작품을 함께 하느라 완전히 진이 빠져버린 어느 회식자리에서였다. 내 앞에 앉은 작가님은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힘들었지?'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처음에는 '아유 괜찮아요'라고 손을 내저었지만 결국엔 눈물이 훌쩍 났다. 참아도 참아도 서러움은 삐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너무 (끅) 힘들었어요(끅)' 하며 울음이 터져버린 찰나, 저 쪽 테이블에서 내 훌쩍임을 들은 선배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야. 니가 뭐가 힘드냐?’
그 한 마디가 도화선이 되었다.
이렇게 힘들어도 서로 토닥이면 다시 또 힘내자고 했을 텐데.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본인이 더 힘들다며 뻐기기만 하는 집단에서 더 이상 함께할 자신이 없었다. 불행 배틀을 하는 것도 아니고... 덕분에 뒤돌아서서 미련 없이 떠났다. 천직인 줄 알았는데... 천직은커녕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그 후로 꽤나 힘들었다. 가장 슬픈 것은 체력의 고통도, 선배의 날 선 한마디도 아니었다. 이제 다시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없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그만둘 거면 빨리 그만둬' 선배들은 첫 입사한 날 나를 붙잡고 그렇게 말했다. ‘아유 선배님 저 진짜 다큐멘터리 좋아해요. 저는요! 여기서 뼈를 묻을 거예요.' 한 치 앞도 모르고 생글생글 웃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 줄만 알았다.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린다.
내 인생에 그토록 힘든 시간이 있었던가. 여의도로 건너가는 한강의 불빛을 보며 생각했다. 매일매일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생각했다.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옷자락을 움츠리며 생각했다. 이게 사는 걸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이게 내가 선택한, 행복한 인생인 걸까...
저 다큐멘터리 조연출 출신이잖아요
회사에서 누군가와 대화하다 이 말을 건네곤 멈칫했다. 너무 오래전 묻어둔 기억이었다. 다큐멘터리 조연출. 내 20대의 이름. 가끔 크레딧에 올라왔던 내 이름 석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곤 한다. 조연출 000. 조연출 000. 힘들게 지내온 그 시절을 압축하는 한마디.
그래도 누군가 후회하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고 싶어서 했고, 할 수 없어서 관뒀다. 그리고 '하지 않은 나' 보다 '해보고 그만두는 나'가 언제나 낫다고 생각한다. 세월은 지나고 기억은 희미하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남는 거 없이 흐트러져가는 기억에도. ‘무언가에 도전했던’ 좋은 나는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