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해도 될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스타트업에 입사한 지 3일이 지났다. 첫날은 호기심반 우려반. 솔직히 말해서 영 아니다 싶으면 빠르게 빽스텝하려고 했다. 스타트업을 둘러싼 수많은 편견과 소문들. 마침 트위터에서 연재되던 <스타트업 수난기> 같은 만화가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스타트업... 괜찮은걸까. 환상 속에서 미리 꿈꾸고 싶진 않았기에 일부러 비추후기, 단점등을 마구마구 검색해서 읽었다. 마음이 좀 싱숭생숭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일단 부딪쳐보기로 했다. 첫 출근. 이제 드디어 '스타트업' 이 무엇인지 경험해 볼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우려는 첫날부터 기대로 바뀌었다. 선임과 함께한 업무미팅. 나의 R&R은 미치도록 구체적이었고 내가 기대했던 직무와 1g도 차이나지 않았다. 스타트업의 특성상 나의 채용자체가 사세확장으로 인한 '충원'이었기에 업무의 자율도도 무척 높았다. 이 부분이 정말정말 좋았다. 이직을 준비하면서 내가 느낀점은 일반기업의 경우 주로 '결원'에 의한 채용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고 나의 자리가 곧 채용사이트에 올라오는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경력직 채용공고는 나처럼 회사를 그만둔 누군가가 있고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채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달랐다. 성장이 빠른 스타트업은 대개가 사세확장으로 인한 '충원'에 의미를 둔 채용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따로 업무 인수인계를 받지 않았다. 이직 첫날. 선임이 내게 공유해준 이슈는 단 두가지였다. 왜 내 포지션이 이 회사에 필요하게 되었는지. 올해 이 회사와 팀의 목표를 달성하기위해서 내 포지션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누군가의 업무를 이어받아서 하는 '결원'에 의한 채용과는 확실히 달랐다. 나는 업무를 처음부터 만들어가기 위해 채용되었고, 그래서 입사 첫날부터 내가 할일을 직접 기획하기 시작했다.
입사 둘째날에는 회의실에서 꽤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어떤 업무를 하나의 프로젝트로 가져가는가 마는가의 의사결정 자리. 선임인 M과 임원진의 대립이 있었다. 임원진은 모두 go를 외쳤으나 선임은 stop을 외친 상황이었다. 그중에서도 임원인 J는 꽤 단호했다. 하지만 M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심 속으로 '아무리 그래도 임원인 데 결국 저 일을 할 수밖에 없지않나.. '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스타트업은 달랐다. 팽팽한 의견대립이 지속되자 결국 대표가 정리에 나섰다.
"결국 이 업무는 M 팀의 업무이기 때문에
M이 동의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아요.
하루만 더 고민해보고
결국 M이 결정하는 방향으로 가시죠"
대표가 실무자의 의견을 적극 존중하겠다는 표현이었다. 아니 의사결정의 키를 실무자에게 주겠다는 선언이었다. 당연히 꽤 놀랐다. 이런게 스타트업이구나. 수평문화라는게 이런건가 싶었다. 내가 다니던 구 회사(일반기업)는 어떤 업무든지 임원의 결정이 우선이었다. 아무리 이상하고 아무리 납득이 가지 않아도... 임원이 까라면 까야하는게 회사였다. 죽도록 하기 싫은 업무도 그래서 여러번 해야만 했다. 당연히 성과는 좋지 않았고 임원에 대한 원망만 남았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달랐다. 대표는 그 부분을 다시 강조했다. "M이 이 프로젝트에 동의할 수 없으면 업무를 하면서도 '그러길래 제가 이거 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하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무조건 M이 해보고싶다, 해보는게 좋겠다라는 확신이 섰을때만 가능한것 같아요"
더 이상의 대립은 없었고 M은 회의실을 나왔다. 그녀는 현명한 사람이었고 곧 나를 포함해서 go를 외친 사람들에게 다시 1:1로 의견을 경청하며 자신의 생각을 리뷰했다. 그리고 다음날, M은 해당 업무를 프로젝트로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결정을 굽힌것이 아니었다. M은 회의실을 나와서도 계속 고민했고 다양한 사람들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본인의 시각을 점검해보았다. M의 결정은 마지못해 따르는 의견의 번복이 아니었다. 충분히 검토하고 생각해본 끝에 내린 '스스로의 의사결정' 이었다.
일반기업을 다니면서 무수한 꼰대를 만났다. 대개 꼰대들은 정말이지 무능했다. (그들이 유능하기만 했더라도 나는 그들에게 꼰대라는 오명을 씌우지 않았을것이다) 대충 대학만나오면 취업이되던 시기에 태어나서, 능력과 무관하게 회사에 무혈입성. 그 후로도 능력은 키우지 않고 나이만 먹어서 장급의 직책으로 버티고 있었다. 꼰대들의 존재이유는 하나였다. 오로지 자기보다 더 나이가많은 임원들의 비위를 맞추기위해서. 나늘 늘 궁금했다. 왜 저들이 나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 빨리 태어나서 나보다 빨리 이 회사에 입사했다는것빼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2-30대가 주로 모여있는 스타트업에서 4-50대 시니어를 만난다면 그는 절대적으로 배울만한 것이 많은 고수일 확률이 높다. 그들은 대개 대표가 삼고초려해서 자문으로 삼고자 모셔온 이들이거나, 업계에서 이미 두각을 뚜렷하게 나타낸 경력자이기 때문이다.
입사한지 3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체 인원이 많지 않은탓에 빠르게 회사의 시니어와 이야기를 나누고 경력을 탐색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다들 감탄이 나왔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업력에서 탄탄한 히스토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대표가 모셔온 회사의 핵심인재들이었다. 배려넘치는 소통을 했고 자기일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으며 저 분들이 이 회사에 있어서 너무 든든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친구와 만나 3일간의 리뷰를 하며 '나 정말 이 회사 너무 잘고른것 같다' 라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어디에나 단점이 있을것이고 이 회사라고 예외는 아닐것이다. 하지만 일반기업을 다니면서 내가 늘 불만이었던 '업무' 에 대한 성장, 내게 주어지길 바랬던 '책임과 권한', 본보기가 될만한 사람들과 조직에서 만나 인생의 1/3을 함께하는 '경험' 이 이 곳에 있었다.
스타트업은 어떤 곳일까. 만약 누군가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면 무조건 한번쯤은 경험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성향에 따라 그곳이 맞지 않을수도 있고, 나처럼 유레카를 외치게 될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인생의 불변 진리 중 하나. 모든 생각은 쓸데없고 경험은 그에 반해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