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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이라는 이름의 버스

키링 다이어리 24 - 라오스 비엔티안(Vientiane)

by 석류



방비엥에서의 마지막 날을 그 어느 순간보다 더 왁자지껄하게 보내고, 비엔티안으로 떠나기 위해 오전 일찍 숙소 앞에 나와 픽업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픽업이 오지 않았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땡볕에 서 있다 보니 지쳐갈 무렵, 나와 함께 비엔티안으로 떠나기로 한 규혁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를 픽업하지 않고 지나친 채 터미널로 버스가 가버렸다는 것. 움직이는 버스 창밖으로 길가에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기사에게 “사람이 한 명 안 탔어요.”라고 말했더니 기사가 시큰둥한 반응으로 이 버스 안에는 사람이 많으니 아마 당신이 찾는 그 사람도 타고 있을 거라고 대답했단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버스 안이 아닌 바깥에 있는데, 확인도 해보지 않고 탔을 거라고 대답하는 건 어디에서 나온 자신감일까. 심지어 픽업하기로 애초에 약속했던 내 숙소 앞까지 와놓고도 멈춰 서지 않고 지나쳐갔다는 게 화가 났다. 규혁이에게 지금 터미널로 가고 있으니, 버스가 출발하지 않게 얘기해달라고 부탁하고는 땀을 뻘뻘 흘리며 캐리어를 끌고 터미널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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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발의 차로 버스에 탔다. 자리에 앉자마자 버스는 곧장 출발했고, 나는 아찔한 마음을 쓸어내렸다. 내가 조금만 더 늦게 움직였더라면 나를 두고 이 버스는 비엔티안으로 갔을 테다. 그러면 나의 오늘 하루 일정은 시원하게 다 꼬여버렸을 거고. 더운 날씨에 의도치 않게 고생을 하게 돼서 화가 많이 났지만, 무사히 버스에 탔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엔티안에 가면 스펙터클한 일이 벌어질 거 같은 느낌이 든다. 이렇게 출발부터 만만치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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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170620_134705901_A4EEAA95-C179-4409-B008-1509BF6A2E76.JPG 이만원도 채 되지 않는 가격으로 코스요리를 맛보는 기쁨.



짧은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비엔티안이었다. 라오스의 수도이자 가장 번화한 도시 비엔티안. 수도답게 방비엥이나 루앙프라방과는 전혀 다른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값비싼 스포츠카도 심심찮게 눈에 띄는 걸 보고, 이곳은 라오스에서 어느 정도의 부가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구나 라는 게 딱 느껴졌다. 사실 라오스에 도착한 첫날 비엔티안에 있긴 했지만, 새벽에 도착해 아침 일찍 떠난 터라 제대로 둘러볼 새가 없어서 이 정도로 번화한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마주한 비엔티안은 내가 바로 수도야!라는 위용을 뽐내며 나를 반겨왔다. 차근차근 거리를 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오늘 밤 비행기로 한국으로 떠나는 규혁이와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까지 함께하기로 일정을 맞췄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한인 쉼터로 가서 짐을 맡겨 두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생각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부다 파크를 가기로 했다. 이제까지 저렴한 현지식 음식을 많이 먹었으니, 한 끼 정도는 좋은 곳에서 밥을 먹기로 하고 라 시그니처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방송에도 나왔던 곳이라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가격이 비싸서 사람이 없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런치타임에는 런치 코스를 저렴한 가격으로 주문 가능했으니까. 일인당 이만 원도 채 되지 않는 가격으로 코스 요리를 맛보고 있으니 오전에 버스 때문에 화가 났던 건 마치 없었던 일인 마냥 사르르 녹아버렸다. 이 음식들을 한국에서 먹는다면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겠지. 코스 요리를 이렇게 저렴하게 먹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아마 라오스여서 가능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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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스러운 점심을 먹고 나니 발걸음이 훨씬 경쾌해졌다. 경쾌해진 걸음만큼, 부다 파크가 기대됐다. 부다 파크는 로컬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달려야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탈 때 버스 요금을 지불하는 줄 알았는데, 그냥 타라고 해서 내릴 때 내는 거구나 싶어서 자리에 앉아있는데 버스가 출발하고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니, 웬 아주머니가 좌석마다 돌아다니면서 버스 요금을 걷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버스안내양도 아닌 요금원이 따로 타고 있다는 게. 탈 때와 내릴 때가 아닌 때에 요금을 걷는 타이밍도.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런 소소한 풍경들이 내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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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0650.JPG 부다파크에는 특이한 포즈의 불상이 많다.
IMG_0653.JPG 라오스에는 이렇게 누운듯한 불상이 많다.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졸리우는 느낌.
IMG_0667.JPG 부다파크에서 만난 고양이.
P20170620_171256065_8461BD8E-22DC-462C-AF8F-5705AEB04158.JPG 버스를 기다리던 그 순간의 하늘이 너무도 맑았다.



부다 파크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입구에서 볼 때는 규모가 커 보여서 둘러보는데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서니 규모가 작아서 아쉬웠지만 특이한 포즈의 불상들이 많아서 나름대로 볼거리는 많았다. 설정 사진 찍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릴만한 공간이었다. 불교 국가답게 불상들을 공원처럼 꾸며놓고, 부다 파크라고 이름 붙여놓은 것 자체로도 신선한 장소. 비엔티안 시내와는 멀리 떨어져 있기에 왕복으로 시간이 두 시간 가량 걸리기에 일정이 빡빡한 사람은 쉽게 구경 오기 힘든 곳이지만, 비엔티안에 오면 이곳만은 꼭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불상을 지나쳐 걸으면 광활한 풀밭이 펼쳐져있고, 나른한 표정의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장면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더 오래 머물며 구경하고 싶었는데, 폐장시간이 가까워와서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했다. 부다 파크를 빠져나와 건너편에서 비엔티안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된 버스 시간도 없어서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마냥 기다리는 모습이 삶과 닮았다는 그런 생각.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라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들이 있다. 그 시간들을 인내한 후 탑승하게 되는 버스가 우리를 꼭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지금과는 다른 일이 펼쳐질 거라는 기대감으로 우리는 버스를 탄다. 여행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새로움이라는 이름을 기다리며 타는 버스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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