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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Aug 30. 2019

비눗방울 속의 너

《문장 21》 2015 가을호

* 추천 BGM - 백아연의 '이럴거면 그러지말지'를 들으며 읽는 걸 추천드립니다.





「비눗방울 속의 너」



 너를 처음 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자주 가던 예술영화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열리던 상영회에서 너와 나는 만났다. 혹시나 늦게 도착하지는 않을까 싶어서 서둘러서 왔더니 되려 빨리 도착해버렸다. 너도 나처럼 늦을까 봐 빨리 온 걸까. 영화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상영관 입구의 간이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네 모습이 보였다. 나도 너를 따라 간이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내가 앉던 말든 너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휴대폰만 내려다보았다. 흐르는 침묵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탕 드실래요?”     


 나의 말에 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동그란 안경을 썼는데 그 안경 뒤로 보이는 눈이 매력적이었다. 멍하니 너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데 네가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내밀어진 손의 의미를 몰라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네가 말했다.      


“사탕 주신다면서요.”     


 아, 사탕 먹을 거냐고 물어봐놓고 주질 않았구나. 나는 급하게 가방을 뒤적여 막대사탕을 꺼내서 너의 손위에 올려놓았다. 네가 짧은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너는 다시 휴대폰에 집중했다. 나는 멋쩍어져서 뒷머리만 긁적였다. 내 모습이 바보같아보였겠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영화 시작 시간이 되었다. 자유좌석제라서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어서 스크린이 잘 보이는 뒤에서 둘째 줄에 자리를 잡았는데 내 앞줄에 네가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상영관 안에 어둠이 짙게 깔렸다. 국내에 개봉했던 작품 중 랜덤으로 세편의 영화를 당일날 라인업을 공개하고, 연달아 상영하는데 첫 번째 영화는 내가 잘 아는 작품이었다. 힐러리 스웽크의 연기가 돋보이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였다. 스크린에 힐러리 스웽크의 모습이 가득 찼다. 이미 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슬프던지 보면서 계속 엉엉 울었다. 울면서 보는데, 네 뒤통수가 자꾸 시선에 걸렸다.      


*     


 네 뒤통수에 신경을 쓰는 사이 영화는 끝이 났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말을 걸까 말까 발만 동동 구르며 고민하는 사이에 쏜살같이 쉬는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상영관 안은 다시 어두워졌고, 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마치 투우사의 빨간 천을 보며 돌진하는 소처럼 너의 옆자리로 갔다. 머릿속으로는 멋지게 네 옆자리에 앉고는 아무렇지 않게 영화를 보는 거였는데, 생각대로 된다면 세상에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거다. 주뼛거리며 나는 네 옆자리를 가리키며 앉아도 되냐고 물었고 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번에도 바보같아보였겠다.   

   

*     


 괜히 시무룩해져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데 네가 귓속말로 말을 걸어왔다.      


“이거 러시아 영화 같죠?”

“네. 주인공 이름이 러시아틱하네요.”     


 내 말에 네가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러시아면 러시아지, 러시아 틱은 또 뭐람. 오늘따라 왜 이러지. 그래도 웃는 네 모습을 보니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 대화를 시작으로 우리는 소곤소곤 영화 중간중간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분명히 진지한 내용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너와 나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맴돌았다. 그렇게 두 번째 영화는 보는 둥 마는 둥 끝이 났고, 세 번째 영화가 시작되었다. 세 번째 영화는 어떤 영화였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는다. 보긴 본건가 싶을 정도로.      


*     


 영화 세편의 상영이 끝나고 나니 어둡던 하늘이 밝아져 있었다. 밤 열두 시에 시작된 상영이 여섯 시가 넘어서 끝이 났으니, 밝아질 만했다. 하늘에 해가 뉘엿뉘엿 출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번호를 물어볼까, 말까 생각하고 있는데 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여기 번호 하나 찍어줄래요?”     


 네가 내민 휴대폰을 얼떨결에 받아 들고 꾹꾹 내 번호를 입력했다. 휴대폰을 다시 받아 든 네가 내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니 간결한 목소리로 이름을 말해준다. 너와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조심 귀중품이라도 대하듯이 네 이름을 번호와 함께 저장했다.     


“연락할게요.”     


 그 말을 남기고 네가 먼저 자리를 떴다. 네가 가고 난 후 한참이 지나도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너와의 짧은 만남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발걸음을 떼는 순간 깨달았다. 너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임을.     


*     


 연락한다던 너는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혹시나 너의 연락이 와있지는 않을까 틈만 나면 휴대폰을 들여다보았지만 휴대폰은 묵묵했다. 결국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너에게서 문자가 왔다. 안 바쁘면 만나자고. 바쁠 리가 없지. 아니 바쁘다 해도 네가 만나자는데 만사 제쳐놓고 만나야지. 후다닥 답장을 보내고 너와 만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머리가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거울도 한 번 보고. 너를 만날 생각을 하니 입가에 배싯배싯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설렘이 가득한 마음을 안고 너를 만나러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해 멀뚱멀뚱 주변만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네가 나타났다. 너의 얼굴을 발견한 내 얼굴은 다리미로 다린 듯이 더없이 환하게 펴졌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요, 방금 왔어요.”

“다행이다. 많이 기다렸을까 봐 미안해질 뻔했는데. 근데 우리 뭐할까요?”     


 뭐할까라는 너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뭘 해야 되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민하며 서 있다가 포켓볼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 이길래 포켓볼을 치러가기로 했다. 만나자마자 포켓볼이라니 뭔가 좀 웃긴 상황 같긴 하지만 그래도 마냥 밖에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 당구장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규칙적으로 같이 움직이는 너와 나의 발걸음이 괜히 좋았다.    

  

*     


 당구장에 도착하자 너는 자연스럽게 장갑을 손에 끼고는 큐대를 잡았다. 예사롭지 않은 모습에 혹시 포켓볼 고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너와 나의 실력은 비슷했다. 그냥 게임을 하면 재미없으니까 내기를 걸기로 했다. 내가 지면 너에게 아이스크림을 사고, 내가 이기면 네가 담배를 한 갑 사기로 했다. 내가 흡연자라는 걸 간파한 너의 제안이었다. 내기를 거니 묘한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너와 나는 팽팽한 게임을 지속했다. 그 팽팽한 분위기를 내가 먼저 깼다. 내 몫의 색깔 공을 구멍으로 밀어 넣는데 아쉬운 표정의 네가 눈에 비쳤다. 넣지 말걸 그랬나. 이겼는데도 별로 기쁘지만은 않아서,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     


 게임이 끝난 후 당구장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서서 너에게 아이스크림을 고르라고 말했다. 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담배는 킵해둘게요. 다음번에 사주세요. 오늘은 제가 아이스크림 살게요.”     


 나의 말에 네가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핑곗거리라도 하나 만들어둬야 다음번에 또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계획을 알아차린 듯한 미소였다. 각자의 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집어 들고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이제 뭐해야 되나 다시 고민에 빠지는데 네가 치킨을 먹자고 했다. 치킨을 워낙 좋아했던지라 치킨을 먹자는 너의 말이 더 반갑게 들렸다. 우리는 치킨 집에 들어서서 치킨을 사이에 놓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로 인해 만났으니 영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사이사이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오갔다. 너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어려 보여서 또래인 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다섯 살이 어리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너는 자연스레 말을 놓았다.     

 

“편하게 불러도 되지?”

“네. 편하게 부르세요. 저도 편하게 대해도 되죠?”     


 조금은 당돌할지도 모르는 나의 말에 네가 풋하고 웃었다.      


*     


 치킨을 먹고 노래방까지 간 후 더 이상 할 게 없어진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고 오늘의 만남은 여기서 접기로 했다. 네가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다. 같이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 앞서 걷는 네 등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문득 업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버스정류장까지 업어주면 안 될까요?”     


 느닷없이 업어 달란 말에 네가 당황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순간 나는 생각을 그대로 내뱉어버린 걸 자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되돌릴 수는 없다.     


“업히고 싶어? 애기네.”     


 네가 당황의 빛을 거두고 귀엽다는 눈빛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오히려 당황한 건 나였던 걸지도 모른다. 장난이라고 손사래를 쳤더니 네가 등을 쑥 내민다.     


“업혀. 저기까지 업어줄게.”

“가방에 든 게 많아서 무거울 텐데…….”

“괜찮아.”     


 네가 등을 탁탁 쳤다. 업히라는 신호였다. 나는 하필이면 오늘따라 더 무겁게 느껴지는 백팩의 끈을 살며시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조심스레 네 등에 체중을 실었다.     


“별로 안 무겁구만.”     


 별로 안 무겁다니. 무겁긴 무겁다는 소리였다. 괜히 업혔다. 안 업힌다고 거절했어야 되는데. 아니다, 애초에 말을 꺼낸 내가 잘못이다. 자책하고 있는 내 모습을 알지도 못한 채, 나를 업은 너의 등이 잔잔한 파도처럼 흔들리며 움직였다. 규칙적인 너의 숨소리가 내 귓가에 가깝게 들렸다. 이윽고 너의 등에서 내릴 때가 되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거다. 막상 너의 등에서 내려오려니 아쉬웠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간사한 사람의 마음이란. 참. 등에서 내려와 얼굴을 마주하니 너의 이마에 조그맣게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미안해졌다. 만난 지 두 번 만에 누군가를 업어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미안함에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네가 말했다.     


“어린이날에 시간 돼?”

“어린이날요?”

“응. 어린이니까 어린이날에 한 번 보려고.”     


 나 어린이 아닌데. 어린이라는 말에 입을 삐죽 내밀었더니 네가 말을 이었다.     


“영화나 한 편 보자. 괜찮지?”     


 영화를 보겠다는 건지 나를 보겠다는 건지. 대화를 이어가려고 입을 달싹이는데 젠장맞을 타이밍 같으니! 버스가 왔다. 다른 때는 한참을 기다려야 오던 버스가 왜 이리 빨리 온 건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내 앞에 버스가 멈춰 섰다. 네가 나의 등을 떠밀었다.     


“그 날 보자.”     


 아쉬워도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만남이 잡혔으니 오늘은 여기서 작별을 해야 했다. 버스에 올라탄 나는 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처음 아닌 첫 만남은 저물어갔다.   

  

*     


 너와의 첫 만남 이후 나는 목이 빠져라 어린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매일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었다. 손가락을 접지 않게 된 날, 너와 나는 다시 만났다.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날 함께 남포동 거리를 걸었다. 공휴일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많은 인파 속에서 너는 혹시나 나를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내 손을 잡고 앞서 걸었다. 너와 나의 맞잡은 손에서는 더위가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그래도 너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용두산 공원 갈까?”     


 앞서 걷던 네가 나의 다른 손에 들린 도시락을 보며 말했다. 너와 함께 가는 용두산 공원이라. 좋지. 나는 좋다고 대답했고, 너의 발걸음이 용두산 공원 쪽으로 바뀌었다.      


*     


 용두산 공원에 올라 우리는 커다란 나무 아래 그늘진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섬주섬 도시락을 꺼내서 먹는데 네가 말했다. 먹는 모습도 어린이 같다, 너. 먹는데 열중해서 몰랐는데 네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대답 없이 도시락에 얼굴을 파묻듯이 먹고 있는데, 지금도 아이 같은데 더 어릴 때의 모습은 어떤지 궁금하다고 스치듯 말하는 네 목소리가 들렸다. 며칠 전 친구들과 어릴 적 사진을 서로 들고 와 구경하느라 가방에 넣어두었던 걸 까먹고 집에 놓고 오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나는 숟가락을 놓고 가방을 뒤적거려 사진 몇 장을 꺼냈다. 갑자기 꺼낸 사진에 네가 놀란 눈이 되었다. 일부러 들고 온건 아니지? 아니에요. 네가 내가 내미는 사진을 받아 들고 골똘히 어릴 적의 나를 관찰했다. 너는 사진을 관찰하고, 나는 너를 관찰하고. 애기 때는 더 귀여웠구나. 너의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 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데, 내 머리 위로 얹어지는 너의 손길이 느껴졌다. 네가 내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지금 보니 어린이가 아니라 꼬마네.”

“저 꼬마 아니에요!”

“꼬마 맞는 거 같은데? 비눗방울 하고 싶어 하는 거 보니까.”     


 웬 비눗방울? 의아한 표정으로 너를 보니 네가 내가 보았던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킨다. 저기, 저쪽에 애기가 비눗방울 가지고 노는 거 보고 있었잖아. 유심히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정말이다. 내 시선이 있던 쪽에 꼬마 아이 하나가 비눗방울을 날리며 놀고 있었다. 눈썰미 하나 좋다. 나는 발견하지도 못한 걸 발견하다니.     

 

“잠시만 기다려봐.”     


 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어딘가로 후다닥 뛰어간다. 잠시 후 돌아온 너의 손에는 뽀로로 모양의 비눗방울 통이 들려있었다.     


“자 여기.”     


 네가 비눗방울 통을 내게 내밀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친절하게 뚜껑을 열어서 시범을 보여준다. 자 이렇게 해야 비눗방울이 잘 나와. 해봐. 너의 시범에 내가 따라서 비눗방울을 불어보는데 내가 부는 비눗방울은 힘없이 금방 터져버렸다. 몇 번을 시도해도 똑같아서 포기하려는데 네가 내 손을 잡고 비누거품을 부드럽게 휘휘 저어서 분다. 세게 불면 안 돼. 살살 불어야 오래 남아있어. 너의 말에 조심조심 비눗방울을 부니 이번에는 꽤나 오래 공중에 방울들이 머물렀다. 잘했어. 네가 웃으며 내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네 손길이 한낮의 태양보다 뜨겁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가니 붙어있는 좌석은 없다고 따로 앉아야 된다고 했다. 그 말에 네가 나를 보더니 다른 극장으로 가자고 손을 끌었다. 다른 극장에 도착하니 다행히 이번에는 같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었다. 대신 기다려야 하는 텀이 좀 있긴 했지만. 건너편 카페에서 앉아 있다가 영화를 보러 들어가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서니 에어컨을 켰는지 시원한 바람이 몸을 감쌌다. 너는 아메리카노, 나는 캐러멜 마끼야또. 커피를 사이에 놓고, 걷느라 지쳤던 우리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나는 눈을 떴다.     


“시간 다 됐어. 이제 가자.”   

  

 영화 시간이 다 되었나 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너와 함께 극장으로 들어섰다. 상영관 안에 들어가니 마음이 두근거렸다. 너를 처음 보았던 그곳인 마냥. 나란히 앉아 스크린을 응시하는데 네가 티켓을 끊은 영화는 코믹함이 가득해서 상영관 안에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너와 나의 웃음소리도 함께 울려 퍼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고. 한창 집중해서 영화를 보는데 음료를 집어 드는 네 손이 내 손과 스쳤다. 그때부터였다. 영화에 대한 집중력이 사라졌다. 내 머릿속에는 너의 손만 계속 둥둥 떠다녔다. 가지런히 팔걸이 위에 올려진 너의 손을 힐끗 보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잡을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너의 손위에 내 손을 올려놓았다. 내손이 너의 손위에 올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스크린만 바라보았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너의 손이 날 떨리게 했다. 내가 느끼는 이 설렘이 너도 같은 거라고 착각하게 말이다.     


*     


 집으로 돌아간 후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따뜻했던 네 손의 온기가 자꾸 떠올라서. 자꾸 뒤척이다 결국 나는 자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펜을 들어 너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펜을 들기 전에는 되게 할 말이 많을 거 같은 느낌이었는데, 막상 펜을 드니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만 편지지 위에 잔뜩 늘어놓고 싱겁게 펜을 다시 놓았다. 이 편지를 보며 네가 무슨 생각을 할까. 우스워보이지는 않을까. 뒷머리를 긁적이다 써놓은 편지를 찢었다. 역시 이대로 너에게 전달은 무리다. 다시 써야겠다. 펜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는 사이 해가 중천에 떴다. 그렇게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날이 밝았다. 완성하지 못한 편지를 남겨둔 채.     


*     


 어린이날 이후 우리는 꽤나 자주 만났다.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네가 부르는 꼬마라는 소리가 익숙해졌다. 익숙해지긴 싫었지만 익숙해졌다. 너와 함께 술을 마시는데 무심코 편지 좋아하냐고 물어봤더니, 왜 편지라도 써주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머뭇거리며 이미 써놨다고 말했다. 내 말에 네가 편지를 보내주면 자신도 답장을 보내준다고 말했다. 답장을 바라고 쓴 건 아니지만 답장을 보내준다는 말에 기뻐졌다. 진짜 답장 써줄 거예요? 응. 이름을 알려주었을 때처럼 간결한 목소리. 그 간결함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져서 나는 더 이상 답장을 써줄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다음 날 나는 우체국으로 달려가 너에게 택배를 하나 보냈다. 편지만 보내기는 괜히 아쉬워서 주전부리도 함께 넣어서 보내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근처 마트에서 종류별로 주전부리를 사서 택배박스에 편지와 함께 넣었다. 택배를 보내고 나니 잘 도착했는지 자꾸 확인하고 싶어 졌지만 꾹 참기로 했다. 별거 아닌데 너무 생색내는 거 같아 보일까 봐.      


*     


 택배를 받았는지 너에게서 고맙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너의 편지도 함께 날아왔다. 너의 편지를 우편함에서 발견하곤 당장 뜯어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껴놨다가 확인하기로 했다. 너는 어느새 내게 있어서 아껴주고 싶은 존재가 되었다. 편지 하나 뜯어보는 것도 고민을 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너의 편지를 깊은 밤에 이불속에 들어가 얼굴만 빠끔히 내밀고 확인하는데, 참 따뜻했다. 너에게도 내가 소중한 존재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따스했다. 나는 너의 답장을 받은 이후 몇 번인가 더 편지를 썼고, 너는 한 번 더 답장을 보낼 뿐 그 이후로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네가 읽어준다는 것 자체로도 난 기뻤으니까.      


*     


 무덥던 어느 날, 아마 복날 즈음이었을 거다. 하얗던 너의 얼굴이 생각나 삼계탕이라도 한 그릇 먹이고 싶어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익숙한 약속 장소에서 만나, 열심히 삼계탕 집으로 나란히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근데 이럴 수가. 가려고 했던 삼계탕집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이전을 했는지 아니면 문을 닫은 건지는 몰라도 사라져 있었다. 당황해서 허둥대고 있는 내 등 뒤로 덥다를 강력하게 어필하는 네 눈빛이 꽂혔다. 더운데 또 걷자고 하기는 미안해서 주변에 있는 차이니스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말이 차이니스 레스토랑이지 잘 꾸며놓은 중국집이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실내에 들어가니 너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식사를 시키고 늘어져있는데 네가 말했다. 언제 말할 거야? 뭘 말할 거냐는 걸까. 무슨 말인지 몰라서 멀뚱멀뚱 눈만 굴리고 있으니 네가 다시 말했다. 언제 말할 거냐고.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주문한 볶음밥 두 개가 나왔다. 볶음밥을 퍼먹으며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네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달싹였다.     


“너 나 좋아하잖아. 언제 말할 거냐고.”     


 예상치 못한 너의 일격에 먹고 있던 볶음밥이 돌을 씹는 듯 딱딱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네가 내가 뱉어내야 할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대답 없이 밥알만 씹는 나를 향해 너는 다시 확인사살을 했다.     


“네가 언제 말할 건지 궁금했어. 나한테 언제 고백할 건지.”     


 고백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내 주변 세상이 모두 멈춘 것 같았다. 컬러풀하던 세상이 흑백으로 변했다. 나는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너에게 말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처음부터. 처음부터 알았어. 처음부터 알았다는 너의 말에 소화가 되지 않았다. 나는 연신 물을 컵에 가득 부어 마셨다. 목이 탔다. 물을 마시는데도 갈증이 났다. 울고 싶어 졌다. 내가 해야 할 말을 네가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나와 근처 카페로 장소를 옮겼다. 커피를 앞에 두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듣는 쪽이었으니, 너의 일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게 맞을 거다.      


*     


 너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호흡도 고르지 않고. 오히려  호흡을 고르는 쪽은 나였다. 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요점만 요약해놓은 필기노트처럼 귀에 쏙쏙 꽂혔다. 네가 수업을 했다면 나는 그 수업에서 에이뿔을 맞았을 거다. 그렇게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잠시 말을 멈추고는 처음으로 네가 호흡을 골랐다. 호흡을 고른 후 다시 말을 꺼낸 너는 마치 높은 절벽에서 내 등을 떠미는 것처럼 잔인했다.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여튼 고마워.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좋아해 준다는 느낌을 받은 건 네가 처음이거든. 좋아해 줘서 고마워.”     


 고마우면 지금 이렇게 네가 행동해서는 안되었다. 내 마음에 비수를 콕콕 꽂아놓고 있으면서, 고맙다고 말하는 건 너무 아이러니하잖아. 고맙다는 말과는 상반되게 너무도 덤덤해 보이는 네 표정이 슬펐다. 머리 위에 환하게 떠있던 태양이 물러가고 먹구름이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얼음이 녹아 커피 잔에 어린 물기가 내 눈물처럼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눈가를 비집고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우는 모습 따위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대충 이야기가 끝이 나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네가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다. 나는 대답 않고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이 유독 더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서있는데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우는 내 모습을 보고 놀란 너는 울지 말라고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나에게 상처를 안겨준 너인데, 왜 이런 순간에도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걸까. 이런 내가 싫다. 너를 좋아한다고 말도 못 하면서 선수를 뺏긴 것에 자존심 상해하는 내가 싫다. 네 품 안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내가 너무 싫다. 나는 그렇게 울면서 버스를 몇 대나 떠나보냈고, 너는 내가 버스를 탈 때까지 품 안에 나를 안고 서있었다.     


*     


 네 입을 빌려 대리 고백 아닌 고백을 한 후, 너와 나의 연락은 조금씩 뜸해졌다. 연락이 뜸해진 만큼 만남도 뜸해졌고 그리고 우리는 만나지 않게 되었다. 무덥던 계절도 어느새 바뀌고, 해도 바뀌어 너를 생각하는 시간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가끔씩 나는 너를 떠올렸고, 네가 떠오를 때면 혼자서 용두산 공원에 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혼자 용두산공원에 왔고, 너와 앉았던 그 벤치에 멍하니 앉아 함께 비눗방울을 불었던 날을 생각했다. 더없이 날씨가 맑았고 너의 머리칼 위로 부서지는 햇살마저도 아름다웠던 그날을.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귓가에 너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비눗방울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해본 적 있어?’

‘아니요. 비눗방울 속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

‘응. 들어가 보고 싶어.’

‘왜 하필 비눗방울이에요?’

‘비눗방울 속에 들어가면 투명하게 다 보일 것 같아서.’

‘뭐예요.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는 거예요?’

‘농담 아니고 진짠데. 진짜로 들어가 보고 싶어.’     


 그때는 알지 못했다. 네가 이미 비눗방울 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걸. 비눗방울 속에 들어간 너는 원하던 대로 투명하게 보게 되었다. 투명하게 나의 마음도 꿰뚫어 보았으니까.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비눗방울은 금방 사라지고 만다는 것. 영원하지 않다는 것. 비눗방울 속에 들어간 너는 금세 사라질까 두려워서 먼저 선수를 쳐 내 마음을 꺼내려했을까. 그래서 정말 나는 너의 두려움처럼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걸 알까. 나는 지금 네 옆에서 사라지고 말았지만 내 마음만은 비눗방울 안에 있으니 어쩌면 네가 맞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른손을 동그랗게 말아 마치 비눗방울을 불듯이 후- 하고 불었다. 손가락 사이로 작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내 머리칼에도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그날 너를 따라 불었던 비눗방울처럼, 조그만 비눗방울들이 바람을 따라 연하게 내 주변으로 날았다. 더 힘차게 날고 날아서 이 바람을 타고 너에게도 닿기를. 너에게로 날아온 비눗방울을 보며, 네가 아주 잠시라도 나를 떠올려주었으면. 안녕, 안녕, 내가 참 사랑했었던 아련한 봄날의 비눗방울처럼 투명했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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