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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영 Jul 24. 2023

저도 가족이 될 수 있나요?

새로 생긴 엄마



이혼 위기였다.

남편에게 시가에 더 이상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선언에 가깝기도 하고 계약에 가깝기도 한 말이었다.

그렇게 결혼 후 처음으로 명절 당일 남편의 부모님 댁에 가지 않았다. 그동안 자주 못 보던 남동생도 보고 텅 빈 집에 혼자 있으니 묘한 해방감에 한번씩 숨을 후헉후헉 몰아 쉬게 됐다.

시가는 아이를 낳고도 명절마다 꼬박 1박 2일 하룻밤을 자고 오던 곳이었다. 언제부터 그런 룰이 정해졌는지 모르겠다. 물론 집에서 시가는 멀지 않았지만, 신혼 초 명절이라도 자고 가는 게 좋겠다는 어른 말에 일박이 당연하게 되었다. 남편도 반기는 기색이었고 모두의 긍정과 다르게 나는 부담되었다. 그래도 어른들이 원하시니까 며느리로서 도리라 생각했다. 불편한 침구에 밤새 잠을 설치는 것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설거지와 어른들의 움직임마다 각종 안절부절은 덤이었다. 쉬어도 불편한 그곳은 내가 객식구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느끼게 했다.

 

결혼 전에는 빨간 날이 덕지덕지한 명절이 다가오는 것이 좋았다. 빨간 애 옆에 빨간 애. 무엇을 하든지 안 하든지 쉬는 날이라는 어감만으로 참 좋았다.

하지만 새로운 식구가 되고 나서는 그날은 더 이상 '쉬는 날'이 아니었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난 뒤에는 가을과 봄의 초입이 오면 달력을 보고 한숨을 쉬는 날이 늘었다. 명절이 채 오기도 전에 가슴이 둥둥거리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아이를 기르면서 좋은 컨디션이나 기분은 정말 얻기 힘든 유니콘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양가 누구에게도 아이를 맡길 수 없던 나는 아이 키우는 내내 쉴 틈이나 숨통이 필요했다. '진짜 쉬는 날'이 간절히 필요했다.

하지만 집에 가서 자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나만 입을 다물면 모두가 만족스럽고 평화로울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언제나 소수의 입장은 꺼내봐야 별 소득도 없고 유별난 이미지만 얻는 나라에서 자랐던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손쉽게 권리를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몇 년을 더 지나가야 하는 줄 그때는 몰랐다. 나는 젊고 체력이 더 있었고 결혼은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랐다. 이렇게 차곡차곡 다른 룰이 만들어졌고 나의 부담은 점점 더 커졌다.


 연락을 자주 하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드리지 못했다. 우리 관계는 아주 오래갈 것이고 오랜 시간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걸 단숨에 알았다. 나는 전화를 불편해 하는 사람이다. 감정적으로 가장 친밀했던 친구들에게도 자주 전화를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만약 남자였다면 이런 내 성향을 가족에게 쉽게 이해받았을지 모른다. "김서방은 원래 좀 무뚝뚝 해. 하지만 사람은 성실하고 착해."라고.

하지만 나는 여성이었고, 며느리었다. 과거에 어떤 성향으로 살았고 지내왔든 간에 연락을 요구하는 시어른들의 말을 거스르는 여성에게 어떤 이해의 말이나 시선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눈치 볼 일들이 쌓여 갔다.


해가 아주 오래 지나고 나서 결국 전화포비아, 전화가 울리면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쿵쾅대는 증상을 얻었다.


어머니 전화는 경련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발신자였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도대체 시어머니에게 얼마나 호된 이야기들을 들었을까 상상하며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떠올려 자극적인 이유를 찾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충격실화와 같이 내세울 만한 에피소드가 전무하다. 다만 그를 만나고 온 다음 일주일은 내내 벽을 보고 죽고 싶게 우울하다라고 생각했을 뿐.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부모님이었다. 그분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같이 기쁘고 좋았다.

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에 만족하던 것처럼 어느새 그의 부모님도 나의 카테고리 안에 스며들며 자리 잡던 시절도 있었다. 오히려 내 부모보다 그의 부모님을 만족시키는 게 더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인정받고 싶고 이쁨 받고 싶었다. 나와 다른 배경의 가족이 또다시 생긴 기분은 포근했고 좋았다.

하지만 내가 만족스러운 며느리가 되기엔 많은 것이 부족했을 것이다. 애를 쓰고 또 써야 겨우 하나쯤 맘에 들고, 그러고 나서는 다시 쌓는 모래성처럼 별일 없이 쉽게 무너지는 그런 날들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아주 최초의 만남에서부터 직감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뵌 어머니는 부드러운 말투 그 속에 드러나지 않는 날카로운 경계심. 그것을 동시에 지닌 분이셨다. 왠지 긴장감을 놓치기 어려웠다. 그렇게 얼굴을 뵙고 나서는 그분을 떠올리면 늦가을 차가운 칼바람 같은 이미지가 떠올랐다. 첫인사 후 어느 날, 아들을 빼앗긴 것 같다고 어머니가 하소연(아마 우셨다고) 하셨다고 들었을 때, 나는 왠지 서늘했다.

 첫 만남 자리에서, 모두 자리를 비우고 나와 어머니만 남았을 때. 테이블에 놓여있던 탁상달력을 끌어와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때 이때는 꼭 어른들에게 전화드려야 한다. 잊히니 달력에 표시해 두거라.라고 당부하던 목소리와 눈빛. 부드러움 속에 절대 물러나지 않는 날카로움. 아니오라고 말이 떨어지기 어려운 무엇.

그래도 싹싹한 여자친구로 보이고 싶어 어머니와 잘 지내보려고 카톡으로 인사를 주고받다 "감사합니다"라고 마무리 인사를 하는 나에게, 이제 가족이 될 텐데 경계가 느껴진다고 정색하시며 "고맙습니다"로 인사를 바꾸라고 했을 때. 심장이 몇 초 정도 멈췄다 뛰는 느낌은 지금도 기억난다. 하하 웃어넘기지 못했다. 그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가 떠올라서. 왠지 모를 서늘함이 카톡창에 고스란히 남아서.

처음이라 그럴 수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므로. 하지만 내가 놀랐던 것은 몇 번 만나지 않는 시기부터 친근함의 표현이 아니라며 정색한 것. 내가 친근한 건 남편이지 처음 본 어머니가 아니었다. 우리는 분명히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감정적으로 친근하게 굴지 않는 나를 나무라는 분위기를  마냥 웃으며 넘길 수 없었다. 이 첫 만남에서 느꼈던 여러 정보들은 결국 미래에도 고스란히 펼쳐졌다.

 내 감정도 내 속도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과 가족이 되는 것은 좁은 문에 코끼리를 빼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임을 그 후 몇 년 동안 살로 부딪히며 깨달았다. 가족은 허울일 뿐. 갑을 관계에 놓인 평생의 을. 서늘함의 정체는 권력. 여자라서 당연히 해야 하는 감정적 서비스는 덤.


초창기에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서늘함은 결혼 후엔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내가 당신 마음에 들게 하지 않았을 때. 나는 자주 그 차가운 눈빛과 얼굴을 마주 해야 했다. 침묵.

내가 유독 견디기 어려워하는 분위기. 그 순간마다 나는 조용히 경기를 일으켰다. 그것이 두려워 어머니 원에 맞추면, 세상 누구보다 환하게 반겨 주셨다. 그 온도 차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가끔 어지러웠다. 그 사이에 나를 두지 않으려고 몸을 멀리 땠다. 차가움과 뜨거움 사이에 몸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용한 경련


 시가 가족들과 지내며 마음이 풀어졌을 때, 무장 해제가 된 나를 가만 두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그 틈을 파고들어 가장 깊은 곳에 '말'을 찔러 넣었다. 나는 손쓸 틈도 없이 그대로 넘어간다. 세월만큼 말들도 켜켜이 쌓였다. 존재가 짓이겨지는 말들. 존재를 꺼트리라고 경고하는 말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 시간 남짓한 거리를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피를 쏟듯 눈물을 쏟아 냈다. 매번 같은 길을 달려 올라가고 내려오며 울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우는 나를 보며 남편은 보통은 어리둥절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식구들 앞에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셨으니까. "사랑하는 윤영아. 어서 와. 엄마는 너를 많이 사랑해." 나는 아직도 집으로 내려오는 그 고속도로 길이 싫다.


왜 사랑한다고 하셨을까? 얼마나 헷갈리고 복잡했는지 모른다. 폐부에 꽂혀 있는 말들이 아직도 생생한데 사랑한다고 말하고 돌아서서 또 다른 상처를 안겨주면서, 항상 사랑한다고 했다.

 그가 말한 사랑이 감각되지 않는데, 명확하지 않은 감정이 나를 휘졌는데 이것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괜찮을까. 어릴 때부터 먹이고 키우고 입히고 혼내고 사랑하며 길러 온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아무런 배경도 없이 어느 날 튀어나온 사람을 가족처럼 여기며 사랑할 수 있을까. 만약 할 수 있다면 '무작정' 사랑하기로 결심해야 할 텐데. 그 길이 너무나 멀고 험해 보이는 건 또 나만의 시선일까. 사랑한다 라는 말속에 "너를 싫어해, 상처 주고 싶어"도 포함돼 있다면 그 또한 아들을 데려간 여자의 숙명인가.

타인이 정해 놓은 조건 속에 끼워 맞추다 병이 난 나를 달래 가며 과거 속 나와 어머니를 본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과거가 된 지금. 내 안에 울렁임이 깊은 소용돌이를 쳤다 흐른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야 할 그것들.


인간은 생의 대부분을 생존을 위해 관계를 맺고 이어 나가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끊어내는 관계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번 명절에도 나는 홀로 집에 남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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