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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영 Jul 12. 2023

그냥 엄마

23년 7월 12일 수요일 


 저녁 외식을 마친 아이는 어리광을 부리며 안아달라고 했다. 좋다. 밥도 든든하게 먹었겠다. 많은 요소가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힘겹게 모두 쳐내며 안아주기로 결심한다. 아이가 20kg가 넘고부터는 번쩍 들어 올릴 엄두가 안 났다. 특히나 출산 후 육아로 망가진 어깨와 손목이 떠올랐다. 아이를 오래 안고난 다음 날 오른쪽 손목의 울부짖음을 여러 번 목격했던 터라 똑똑한 두뇌는 경고음을 울렸다. 

나를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에 쪼꼼 한 입술이 파묻힌 두툼하고 매끄러운 볼을 보고 다시 힘을 냈다.

번쩍 들어 올려 안았다. 역시 묵직하다. 

아기 때 그대로 냄새가 났다. 살과 살이 닿는 모든 부위가 보드라웠고 따뜻했다. 얼마 만인가. 이렇게 번쩍 안아준 것이 삼 년이 넘은 것 같다. 예전 생각이 나서 한참을 아이를 안고 있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사랑스러운 촉감은 팔에서 느껴지는 무게의 고통으로 금방 사그라들고 말았지만.


나에게 육아는 늘 이랬다. 아이를 느끼고 충분히 사랑할 시간을 갖기엔 다른 무게로 늘 버거웠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에는 마치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이 자동으로 포함된 것만 같았다. 정작 '잘' 키운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손쉽게 육아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아이를 위해 최소한의 자극이 있는 환경에서 출산하는 것(자연주의 출산)부터, 심리적 안정과 면역력을 위해 모유를 준다던지, 정서적인 안정과 애착을 위해 아기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든지 그 외에 모든 육아의 단계에 마다 주 양육자에게 부담했던 인터넷 속 전문가들의 다양하고 넘치는 육아 지식. 그것들에 짓눌려 정작 산모였던 나의 커다란 신체적인 변화와 정신적인 혼란을 손쉽게 눌러 버렸고, 아기는 그런 엄마에게 존재에 대한 순수한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자랐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 하면, 육아하는 동안 나는 대부분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기도 이 세상에 처음, 나도 세상에서 생명체를 낳고 키우는 게 처음.

처음이라고 신생아와 똑같이 나도 목 놓아 울 수가 없었다. 혼란을 혼란이 아닌 것처럼, 처리해 나가야 할 일들이 눈앞에 매일 펼쳐졌다. 다행히 대부분의 일들을 꾸역꾸역 잘 헤쳐 나갔다. 다만 대부분 아기와의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항상 긴장하고 걱정하고 다음을 생각하느라 눈앞에 아기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구글포토 속 사진만이 내가 키운 아기를 증명한다. 나는 내 안에 불안이라는 사건을 처리하는 것에 열을 올렸다. 그게 사랑을 주는 일이라 굳게 믿었다.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랑이다. 경고음이 매 순간 느껴졌지만, 그것을 찬찬히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어서 빠르게 흘러 아이가 빨리 크기만을 매일 바랐다. 나의 삼십 대의 3분의 2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나중에서야 무사히 지나온 유아기의 원인이 아이가 순하고 별 탈 없이 건강했던 덕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큰 축복이었고 내 육아 이야기는 대부분은 원활한 내용이 흘러가는 운 좋은 케이스였는데. 나는 왜 항상 버거웠을까?


다른 사람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비난이 두려웠다. 나쁜 엄마가 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특히나 아이가 순하고 건강하고, 남편이 육아에 적극적이고 야근도 없었다. 배부른 자라는 오명이 따를까 봐. 혹은 자신이 자의로 선택해 놓고 칭얼거리는 철없는 사람으로 비칠까 봐. 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묵묵히 행복하게 일을 해내는 사람처럼 외부에 내 모습을 세팅에 두고 숨었다.

반전이라면 반전은 꽤 높은 타율로 육아 목표를 이루고 나서도 정작 엄마로서 어떤 효능감도 느끼지 못했다. 육아는 다른 어떤 일들처럼 사회적으로 성취해야 할 일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다. 초보 엄마는 이제껏 그랬듯 사회적 선상에서 열심히 전력 질주를 했다. 아이는 영문도 모르는 채 열심히 뛰는 내 품에 매달려 앞으로 나갔다. 육아는 고유한 영역이고 그저 아이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즐거운 행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를 안고 몇 걸음 채 걷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끄억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기분이 좋았다.

아이는 완전히 만족하지 못했지만, 꽤 웃음이 얼굴이 번져 있다. 나는 눈빛으로 마저 안아준다.

통통한 볼을 한없이 비비며 엄마의 존재를 너의 존재를 그 공간에 가득 채운다.

이제 비로소 너를 똑바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 가득 비워진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그 순간에 육아 지식은 없었다. 너를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도, 발달에 필요한 다음 단계를 계획하는 일도 없었다. 네가 외로울까 봐 상처 줄까 봐 종종거리는 마음 따위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저 아이와 내가 그 공간에 서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고 살결을 느끼고 존재를 기뻐하며 그 밤 속에 뚜렷하게 서 있었다.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아이도 나도 피부로 냄새로 느끼고 있었다.


왠지 손목이 아프지 않은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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