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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영 Mar 04. 2024

꿈꿨던 우리 집 2

돈을 훔친 이유



2


어느 날 꿈꿨다. 4층 높이에 리조트 모양을 한 복도식 아파트 구석구석을 다닌다.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곳에는 오직 나 혼자 다른 집에도 들어갈 수 있고, 자유롭다. 창문으로 이웃집을 들여다본다. 빨래 걸린 것부터 살림살이들이 다 보인다. 나는 긴 복도를 오가고 실 내외 자유롭게 다녔다.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면 뒤편 작은 동산이 보이고 그 앞에 화단에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심어져 있다. 나는 마치 그곳에 오랫동안 산 사람처럼 여기저기 다니다 꿈에서 깼다. 참 이상했다. 살면서 기억에 남는 꿈들은 보통 사람이 꼭 등장했다. 친한 친구가 죽는 꿈, 당장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데 하나도 연습이 안된 채로 대기실에서 종종 거리는 꿈. 멋진 상대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 꿈.. 그런데 그 꿈에는 사람도 상황도 없다. 그런데도 며칠이 지나도록 건물 구조를 구석구석 종이에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이 꿈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만 같았다.


몇 개월 뒤, 친정에 갔다가 아이를 맡기고 근처로 여행을 갔다. 오랜만에 주워진 자유로움에 남편과 신나게 달려갔다. 도착한 곳은 어릴 때 살았던 도시였지만 떠난 지 오래라 아는 곳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개발이 된 탓도 있고 익숙한 건 도시 이름뿐 사실상 모르는 곳을 여행하는 것과 같았다. 어느덧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저녁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어릴 적 살았던 집에 가보고 싶어졌다. "금장"이라는 아파트 명은 기억 하고 있었고 남편도 궁금하다며 적극적으로 가보자 했다. 내비게이션을 검색해 보니 마침 친정집 가는 방향이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아주 깜깜한 밤, 어스름한 가로등 사이로 아파트가 보였다. 낮은 층의 동들이 줄지어 있었다. 차를 세우고 가까이 걸어가 보았다. 덩달아 내 가슴도 두근두근 뛰었다. 가까워져 갈수록 점점 오래된 아파트의 외관이 드러났다. 근 40년 된 건물의 위엄 앞에 입이 떡 벌어졌다. 세대 군데군데 불이 켜 있고 복도에 쌓인 살림들이 눈에 보였다. 발길이 닿는 곳으로 걷다 어느 동 앞에 멈춰 섰다. 그때부터 서서히 건물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부터는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려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몇 달 전 꿈꿨던 그 집이 바로 이곳이었다고 알아차린 순간이. 웃었다 울었다 눈물이 범벅이 되어 횡설수설하는 나를 따라 남편이 가만히 걸어 주었다. 꿈속에서 오르내리던 계단은 현실에서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 또 뒷 산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내고 고개를 돌리면 같은 위치에 뒷 산 있었다. 믿을 수 없어서 넋 나간 사람처럼 같은 자리를 빙빙 돌아다녔다. 여전히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이상한 감정을 안고, 꿈속 그곳이 맞는지 확인했다. 화단에 심어진 나무 위치를 보고 나서 알았다. 나는 이 집을 내내 기억하지 못했지만 내 무의식은 한 번도 이곳을 잊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엄마를 만나 이 이야기를 해줘야지. 하지만 엄마 얼굴을 마주했을 때, 정작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꿈이 금장 아파트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그 누구보다 그 집을 기억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어 달려와 놓고 말은 시작도 전에 목구멍에서 조용히 소멸했다. 그날 이후 그 꿈도 서서히 잊혀 갔다. 다시는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홉 살 때 살던 금장 아파트를 기억해 본다. 베란다 쪽으로 펼쳐진 논에서 개구리가 크게 우는 소리가 열어둔 창문 타고 매일밤 들려왔다. 멀기도 가깝기도 한 그 소리는 편안히 저녁을 맞이하기 좋았다. 학교 가는 길은 석고 상을 만드는 커다란 작업장들이 양쪽으로 들어서 있었는데, 매일 위치가 바뀌고 추가되는 새로운 작품들을 빠르게 훑으며 두리번두리번 구경하며 걸었다. 반가부좌 상, 말, 호랑이... 크기가 크고 진짜 같아 무서운 것도 있었다. 그럴 땐 빠르게 시선을 돌려 다른 것을 보면 된다. 인도가 따로 없던 찻길에 차가 달려오면 흙먼지도 같이 날려 올라왔다.

하교 후엔 거실 어딘가에 배를 깔고 누워 빈둥거렸다. 그러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후다닥 책상으로 달려 앉아 펜을 집어 들었다. 가슴이 콩콩 뛰고 다리가 너무 꼬여서 곧 오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온 신경은 현관문이 닫히고 집으로 들어오는 발소리에 가 있으면서도 문제집을 바라보는 눈과 손은 유지해야만 했다. 언제든 방문이 열리면 공부하는 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어느 날은 감당 못할 짜증이 온몸 구석구석 몰려와서 의자에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소리 없는 몸부림을 치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아무도 몰랐지만, 나는 알았다. 그게 얼마나 이상하고 괴상한 몸부림인지도 느껴지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뾰족한 모양으로 다듬어진 은빛색 매니큐어가 반짝이던 엄마의 손톱. 씻겨지는 동안 엄마 손 감촉을 즐기다가도 다급하고 투박한 손길 사이사이로 살을 콕콕 찌르고 마는 엄마의 예쁜 손톱.

어느 날 현관문을 박차고 빠르게 내 시야에서 사라지던 엄마를 눈으로 좇다가, 안방 문을 열고 침대 위 진녹색 잠옷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엄마 냄새를 킁킁 마셨다. 들어마시는 냄새 한 번에 엄마를 부여잡고, 내쉬는 숨에는 잠옷 주인의 부재가 선명해서 목이 따끔거렸다. 엄마 엄마 울음에 뒤섞인 소리만 방안에 울려 내 귀를 때렸다.

매일 아침 멍한 표정으로 침대 앉아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엄마를 바라봤다. 그런 엄마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춰보려고 하다 실패하곤 했다. 머뭇거리다 입에서 토해낸 말은 '엄마 내가 뭐 잘못했어?' 였던가. 그럼 '아니'라는 말이 돌아왔다. 차라리 내가 잘못한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수학 문제집 풀 때 어려운 건 맞아놓고 쉬운 건 틀리는 실수를 하는 게 괘씸하다고 하던지, 큰 이모랑 살고 싶다고 말해서 서운하다던지, 아니면 아침밥 먹을 때 편식 없이 골고루 먹으라든지. 뭐든 뭐라든 이야기해 줬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내가 최선을 다해 고치고 그러면 엄마가 웃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 단념하며 학교 갈 준비를 했던가. 그 뒤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창문을 뚫고 듬성듬성 내려오던 아침 햇살과 그 빛 사이로 떠다니던 조용한 먼지들이 가만히 나를 만져주었던 기억만 난다.


언젠가 엄마에게 그때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실 훔친 돈으로 집 앞 트럭에서 파는 핫도그를 두 개씩 사고도 거스름돈이 많이 남는 기쁨으로 하루를 잘 넘어갈 수 있었다고. 그게 도벽의 이유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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