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영 Jul 21. 2023

꿈꿨던 우리 집 1

어린 시절 기억과 현재


1


그날 저녁 나는 도마 위에 손을 올려두고 벌벌 떨고 있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칼을 찾아와 나에게 점점 다가왔다. 도둑질하는 손은 콱 잘라버려야 한다고 했던가. 자세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중이었다. 내 나이 아홉 살 무렵. 그 여름밤의 기억은 장마철처럼 시야가 조금 뿌옇고 살갗은 눅눅하지만 어떤 인상만은 선명하다. 나는 그 이후에 아빠 지갑 그리고 그 누구의 물건에도 손대지 않았다. 엄마가 옳았다. 손이 잘려 나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껴야 자식은 더 이상 손버릇 나쁘게 크지 않을 거라는 거. 진심으로 손을 자를 생각도 없었으면서 최대치로 위협하는 엄마의 그 태도만은 선명하니까. 그렇게 엄마와 나. 서로의 역할대로 바르게 마무리되었다. 내 도벽의 진짜 이유는 무겁게 무겁게 아래로 가라앉아 영영 갇히고 말았지만.


올해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의 아이는 홀로 아파트 단지를 누비며 학교와 집을 오가는 것들 좋아한다. 위치 추적을 몰래 켜고 아이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알리지 않았다. 유치원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멋진 초등학생인 나' 폼에 깊게 취한 나의 어린 병아리를 실망하게 할 수 없었다. 어느 평범한 하굣길, 몰래 마중 나갔다가 아이가 근처 편의점 앞에서 멈춰 서는 것을 봤다. 나도 뒤따라 멈췄다. 한참 가방을 뒤적거리다 손에 들려 나온 것은 노란색 체크카드였다. 바닥에서 고무줄 하듯 두 번 팔짝팔짝 뛰더니 그것을 가지고 편의점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멍하게 봤다. 재빨리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가지가 머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용돈을 달라고 며칠 내내 이야기했던 것, 다른 친구들은 카드나 돈을 들고 다니며 편의점에서 맘껏 물건을 산다고 푸념하던 모습. 저 낯익은 카드의 주인은 남편 것이 분명했다. "여보 지갑에 노란 카드 있는지 확인해 봐" 다급한 내 목소리를 들은 남편은 잠시 무언가를 뒤적거리는 소음을 일으키다 "어? 없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점점 눈앞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혹시 훔친 건 아닐까? 엄마에게 말하면 안 사주는 것을 학습한 아이는 결국 아빠 카드에 손대 버린 걸까.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떡하지. 아이는 아직 편의점 안에 들어가 있고 당장에 그 녀석 팔목을 잡고 끌고 나와야 하나. 가슴이 둥둥거려서 얕은 숨을 내 쉬며 편의점 입구만 초초하게 바라봤다. 남편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아 어제 같이 마트 갔다가 혼자 계산해 보라고 시켰거든. 그러고 나서 카드 달라는 말을 깜빡했다.." 다행이다. 훔친 게 아니었구나. 그 소리에 곧 달려갈 듯한 발이 멈춰 서고 아이가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여전히 가슴은 출렁댔다.

아이는 예상보다 한참이 지난 후에 편의점 밖을 나왔다. 걱정과는 달리 작은 크기의 초코볼 한 봉지를 들고 주변을 휙휙 돌아보더니 가볍게 콩콩 제자리를 뛰었다. 뭔가 대단히 즐거워 보이는 그 몸짓을 나는 그렇지 못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복잡하면서도 귀엽기도 하고 당장 어깨를 붙들고 추궁하고 싶은 마음도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얕은 숨을 조금씩 뱉으며 아이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매일 보는 엄마를 의외의 상황에서 보면 이렇게나 못 알아보는구나 싶었다. 몇 번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때마다 못 알아봤고 점점 집과 가까워졌다. 나중에는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는 곳에 대놓고 쫓아가며 나를 발견하기를 기다렸다.

"어? 엄마!" 마침내 엄마를 알아본 아이가 첫 번째로 한 일은 0.1초의 반가움과 동시에 어색하게 웃으며 가방과 등 사이로 초코볼 봉지를 넣어 뒷짐 지어 숨겼다. 나는 모르는 척 반갑게 인사했다. 좋은 타이밍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볍게 서로에 안부를 묻고 나니 딱딱한 냉동 딸기 같던 아이의 얼굴이 햇빛에 조금 말랑 하게 풀어진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 사실은 나 이 카드로 이거 샀어." 초코볼이 내 앞에 불쑥 내밀어져 있었다. 덩달아 갇혔던 숨들이 한꺼번에 새어 나왔다. 걱정이 무색할 만큼 아이는 자신이 한 일을 있는 그대로 털어놨다. 다리가 조금 풀려버려 그대로 주저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눈을 마주 보며 알게 되었다. 아이는 이것이 완전히 잘못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친구들처럼 카드를 들고 자유롭게 과자를 사고 싶었던 바람을 충족시키고 싶었다는 걸. 만약 그날 들키지 않았더라도 집에 돌아오면 있었던 일을 줄줄 털어놓았을 것이었음을. 부모로서 비루한 상상력을 가진 엄마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린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맥없이 바닥에 쓰러져 버린 엄마를 아이가 바라봤다.

조금씩 웃음을 찾아가는 아이에게 그래도 카드를 몰래 쓴 것은 잘못이라고 일렀다. 엄마 입에서 확실하게 잘못임을 지적받은 아이는 되려 완전히 편안해졌다. 우리는 무언의 목소리로 서로를 바라봤다. 동공이 점점 확신에 찼다. 서로를 꼭 안고 나서 몸을 땐 아이는 신나는 호흡으로 말했다 "엄마도 초코볼 한 입 먹어볼래?" 입안으로 동그랗고 달콤한 초코볼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아이의 볼에 입술을 파묻고 비볐다.





                                                                                                       

                                                                                                          

이전 01화 태어나 보니 엄마 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