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도 콧바람을 쐬러 소종 Sauzon에 갔다. 정말 작은 마을이라 무슨 식당에서 무슨 메뉴를 파는지 다 훑고 지나가는데 못 보고 지나친 작은 갤러리가 눈에 들어왔고 전시된 몇 점의 그림들 중 A4 두 장을 합친 크기 정도의 이 그림이 나를 멈춰 서게 했다.
처음 Sauzon에 도착해서 마을을 내려다 보고 너무 아기자기하고 예뻐서 탄성을 질렀었다. 초행길이라 바라미를 세워둔 곳에서부터 이 곳까지 투덜대며 30분을 넘게 걸어왔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파스텔톤으로 칠한 외벽들에서 '나 엄청 귀여울 거거든'이라는 인상을 먼저 받고 그 뒤로 가지런히 줄 맞춰 정박된 배들이 점점이 보인다. 이 그림은 그 어떤 잘 찍은 사진보다도 Sauzon을 잘 표현했다. 이 곳의 사랑스럽고 잘 정돈되고, 이렇게나 아기자기한 데에 비해 관광화되거나 상업화된 거 없이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분위기에선 인어가 있대도 믿을 만하다.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그림은 처음이었는데 가격을 보고 절망했다. 개인적으로 부담되는 수준이었지 꽤 타당한 가격이었다. 그래서 역시! 하며 돌아섰다. Sauzon이 언제까지나 이런 마을로 계속 남았으면!
다음 날, 다음 목적지인 île d'yeu로 가는 방향으로 순풍이 예상됐다. 바라미와 같은 요트는 순전히 바람에 따라 여행이 좌지우지된다. 바람이 지속적으로 그 방향으로 불어주면 새벽이 됐던 언제가 됐던 떠나야 하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꼼짝없이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른 여행인 셈이다.
바티는 매일 잠수복을 갖춰 입고 물에 한 번 씩 들어갔다 왔는데 매번 허탕만 쳤었다. 물고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날 오후 누군가 배를 톡톡 두드렸다. 옆 배 미쉘 할아버지였다. 밖으로 나가보니 통발에 우리나라 대게를 닮은 araignée 가 잡혔다며 솥에 쪄서 1시간 뒤에 주겠다고 하셨다. 대게가 들어갈만한 큰 솥도 없는 것까지 다 감안하고 먹기만 하면 되는 상태로 주신다니 정말 감사했다. 미쉘 할아버지네는 매년 이 곳을 찾는데 올해만큼 이렇게 고기가 없는 적도 처음이라고 바티가 아무것도 못 잡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내가 우리한테 줄만큼 대게를 많이 잡았냐고 물어보니 그런 것도 아닌데 그냥 주고 싶어서 주는 거라고 하셨다.
대게가 쪄지는 시간에 맞춰 냄비밥을 했다. 대게가 도착하고 감사하고 잘 먹겠다고 거듭 인사하고 갓 지은 고슬고슬한 쌀밥에 간장을 좀 뿌려 둘이서 손으로 게눈 감추듯.. 단숨에 먹어 치웠다. 너무 달고 맛있어서 흡사 며칠 굶은 짐승들처럼 손가락을 쪽쪽 빨며 내장에 밥까지 비벼먹어 저녁을 해결했다.
간이 보트에 점점 바람이 빠지는 게 보여서 혹시 구멍이라도 났나 했는데 다행히 멀쩡했다. 바티가 모터도 열어서 부품을 닦고 점검했다. 어느 날은 자전거를 빌려 더 멀리 있는 해변에도 다녀왔다. 역시나 그곳까지 가서 하는 건 누워 있다가 해가 너무 뜨거우면 물에 들어갔다를 반복하는 것뿐.
배 내부도 떠나기 전 깔끔하게 정리하고 모든 건 제자리에 = 찬장 안에 둔다. 그렇지 않으면 항해 중에 우당탕탕 떨어지기 때문에.
다음 목적지는 일 듸유 île d'yeu인데 '듸유'라는 발음이 신을 뜻하는 Dieu와 같게 들린다. 그래서 스펠링을 몰랐을 때는 이 섬의 이름이 정말 <신의 섬>인 줄로만 알았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순항을 예상했었는데 정말 그랬다. 기분 좋은 파도와 바람이 계속됐다.
항해일지.
파도는 우리를 높여주고 우리를 밀어주고 우리를 감춰주고
믿을 건 바다와 바람뿐이었고 보이는 것 또한 바다뿐이었다. 파도가 한 번 치면 바티가 그 파도에 업히게끔 키를 살짝 밀면 딱 그만큼 그 파도에 밀려 바라미가 나아갔다. 참으로 정직하고 정당한 여행이다. 크고 고른 파도가 일정하게 오면 보폭을 넓게 해서 걷는 것처럼 좀 더 빠른 속도를 냈다. 파도가 우리를 보살피고 우리의 보폭을 주관해서 어떤 신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오전 10시경 혁오 밴드의 settle down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돌고래 한 마리가 모습을 보였다. 처음 본 돌고래였다. 그 한 마리는 배 왼쪽에서 나타나더니 오른쪽에서도 한 번 더 모습을 보이고 사라졌다.
일 듸유 항구에 늦은 오후에 도착해서 배를 묶어두고 5분도 지나지 않아 바라미와 같은 크기의 배가 들어왔고 자리가 부족해 우리 배와 커플로 묶기로 했다. 배 주인아저씨와 인사를 나누는데 검은 털의 개 한 마리가 선실에서 튀어나와 우리 배에 올라탔다. 너무 친근하게 굴어 마구 귀여워해줬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 커튼을 걷자마자 그 틈으로 이 녀석이 얼굴을 내밀어 나를 빵 웃게 만들었다. 항구에 정박한 다른 배에서 항해하는 고양이도 봤다. 아마 어릴 때부터 배에 많이 타 보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양이는 역시 개보다는 배에 태우기가 훨씬 까다롭다고 들었다. 언젠가 좀 더 큰 배를 사서 우리 집 고양이 이비자와 꼭 같이 항해하길 기대하고 있다.
일 듸유는 본격적으로 바다를 건너 스페인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른 섬이다. 항구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동전 빨래방에서 세탁기 2대를 돌려놓고 큰 마트에 장을 보러 다녀왔다. 장은 80유로치를 봤다. 바티가 바다를 건너는데 3일 정도를 예상했고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이 날 당장 해 먹을 불고기만 생고기를 샀고 나머지는 모두 통조림이나 훈제 햄으로 준비했다. 특히 과일을 종류별로 다양하게 많이 샀다. 와인, 시드르 등 술도 잊지 않고 샀다.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도 들렀다. 항해 유람을 한 지 10일째인데 밤에 잠을 자다가도 수십 번을 깬다고 했다. 약사 아저씨는 잠이 들긴 드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럼 됐다고, 원래 배에선 다들 잘 못 잔다며 잠 오는 약보다는 비타민이나 먹으라고 해서 쿨한 처방에 따랐다.
이 때도 감이 잘 안 왔다. 직선으로 바다를 건너서 스페인 히혼 Gijon에 도달하는데 3일 즉 전반적으로 순풍을 맞는다고 계산했을 때에 7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이제까지 이동거리 중에 제일 길었던 게 10시간 안이었으니 그거에 7배만큼을 준비하면 될까? 것도 아니다. 마실 물과 쓸 물을 최대한으로 채우는 걸 우선으로 했고 나머지는 적당히 준비했다. 물론 기름도 양껏 채웠다. 이불과 모든 옷들도 말랐고 저장고도 가득 채웠으니 떠나는 일만 남았다. 걱정은 크게 안 됐던 것 같다. 그저 돌고래를 실컷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 멀미를 안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정도. 쉽진 않을 거다. 밤에 교대로 3-4시간씩 돌아가며 키를 잡아야 하니. 오히려 바다로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위험요소는 줄어든다. 바라미를 믿고 바티를 믿고 따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