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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희 May 01. 2024

네 자신을 걸어둔 곳이 너의 집이다

내가 머물 곳을 정한다는 것

<네 자신을 걸어둔 곳이 너의 집이다>는 오늘 아침 읽은 이제니 시인의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 나온 시제이다.


한국에 온 지 1년 하고도 한 달 반이 지나고 있다. 어제 오랜만에 본 엄마 친구분이 '이제 한국엔 좀 적응이 됐어?'라고 물으시기에 "그럼요" 랐더니 엄마가 "아유 적응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여기서 났는데"라고 하셨다.


나는 여전히 침대 없이 지내고 있다. '내 방'이라고 불리는 방이 하나 있고 그 외에도 가족들 중 나만 들어가는 중간방이 하나 더 있는데 그 방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생, 유학 가기 전의 모든 흔적과 옷가지들이 방을 디귿자로 둘러싼 책장과 옷장들 속에 마치 유물처럼 전시되어 있다. 며칠 전부터 큰맘 먹고 정리를 하기 시작해서 서재 겸 꽃 작업실로 쓰려고 하는데 방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6인용 식탁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내가 길에서 데려온 두 마리의 고양이만이 이 집에서 유일한 나의 소유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 나는 이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유일하게 밥을 차려먹는 사람도 나이고 단시간에 가장 많은 내 물건들을 강박적으로 늘어놓는 사람도 나이다. 말끔했던 엄마의 공간에 내 흔적들이 쌓여간다.


어느 날 거실과 주방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엄마는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물어보랐고 주방불과 거실불 모두가 규격화된 같은 전등이니 근처 마트에 가서 사 오면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단지 입구의 슈퍼에 가서 같은 와트의 브랜드만 다른 두 개의 형광등을 봤고 계산대에 가져오니 따로 안 알려주셔도 척척 잘 찾아오시네요 라는 소릴 들었다. 프랑스 집들에선 웬만한 일은 혼자 처리해 왔고 가구 조립이나 집 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나름 즐거움을 느꼈었다. 이번에도 나는 식탁 의자 위에 잡지 여러 권을 쌓아놓고 올라가 주방과 거실 불을 혼자 갈았다. 생각해 보니 이 근처 일대 수백 명의 아파트 주민들이 모두 같은 전등을 쓴다는 것에 무척 소름 끼쳤다. 정해진 날에 분리수거를 하고, 같은 장소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다. '내 집'이란 고유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 무서웠다.  


2019년 6월에 쓴 글.




이 글을 쓴 지 5년이 지났다. 나는 꽤 오랫동안 한국 집 주소를 외우지 못했고 도로변에 난 후문을 통해 바로 아파트 입구로 들어오지 않는 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어이없게도 1년 가까이 그랬다. 호기롭게 "그럼요 적응하고 말고요" 랐지만 실은 논밭을 갈아엎은 또 다른 신도시였던 파주가 나의 도시 같지도 않았고, 엄마의 집, 아빠의 집 또한 내 집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 형광등을 사러 가거나 쓰레기봉투 정도를 사러 몇 달에 한 번씩 들른 게 전부인 집 앞 슈퍼에서 어느 날 계산대에서 아주머니가 "4땡땡땡 이파니 씨" 라며 싱긋 웃어 보이며 알아서 포인트 적립을 해주시는 모습에 놀라서 벙쪄 있다가 나오면서 어? 나 드디어 이 동네 사람이 된 건가?라는 안도감이 들었던 적도 있다.

5년의 시간 동안 우리 아파트 단지 맞은편에 있던 "길 없음" 이란 표지판이 치워지고 그 끝자락의 땅엔 아파트가 올라갔고 슈퍼는 24시 편의점이 되며 주인도 바뀌었다. 나는 여전히 침대 없이 지내고 있지만 맨 끝 방을 내 서재로 만들었고 그 사이 한국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 또 내 오랜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고 음식을 대접하고 나눠 먹으며 점점 내 집임을 실감하며 지내고 있다.


프랑스에선 사람들을 내 작은 집에 빈번히 초대했었다. 의자가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일단 초대했고 사람 수대로 음식을 하고 식탁에 둘러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 주엔 마리안네, 그다음 주엔 한국오빠네로 우리는 끝없이 옮겨 갔다.


온기와 술과 담배, 눈 마주침, 이야기만이 존재했다.

식탁 위에서 앞에 사람을 두고 숟가락을 드는 순간조차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대의 사람이 돼 버린 지금, 문득 그때 우리는 매일 밤이 새도록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나눴던건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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