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는 영찬씨의 두 번째 질문
꽃이 시들 때는 어떤 기분인지
꽃 일을 하기 전엔 이렇게 많은 꽃을 만져본 적도 없지만 이렇게나 많은 꽃을 버리게 될 줄도 몰랐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개를 정말 좋아하는 프랑스 친구가 지역마다 있는 유기견협회인 SPA에 자원봉사를 하려고 했다가 주로 하는 일이 살아있는 개를 돌보는 게 아니라 이미 오래 방치된 개들의 안락사를 돕는 일이란 걸 우연히 듣고선 결국 그 일을 하지 못했던 게 떠오른다. 꽃은 물이나 온도 등 환경에 영향을 받고 더욱 생기 있어지기도 축 쳐지기도 하니 살아있는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난 꽃의 사체들을 치운 셈이다. 심지어 얼른 치우지 않으면 화병 안에서 줄기가 썩기 시작해 고약한 냄새마저 풍긴다.
꽃은 언제부터 시든다고 봐야 할까? 꽃이 시들면 더 이상 꽃이 아닐까? 어떤 꽃들은 물에 꽂혀 있어도 줄기 속부터 비워지고 말라간다. 아무리 가위로 줄기를 짧게 잘라줘도 더 이상 물을 빨아들이지 못하면서 꽃잎이 변색되거나 바스러진다. 하룻밤 사이 줄기가 휙 꺾이며 고개를 떨구는 꽃들도 있다. 그런 꽃은 그냥 두질 못한다. 정말로 생을 다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다. 마치 봐선 안 되는 걸 보고 있는 것처럼 견딜 수가 없다.
특별하게 불편하거나 슬픈 감정을 느낀 적은 없지만 꽃학교에 다닌 지 얼마 안돼 수업하고 나서 가져온 꽃들을 마지막까지 두고 보다가 한꺼번에 버려야 할 때가 있었다. 엄청난 양의 꽃을 들고 쓰레기통 앞에 서서 문득 '꽃을 일반쓰레기로 분류하나?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내 '그럼 어쩌겠어' 하며 줄기를 두어 번 더 꺾어 버렸었다.
얼마 전만 해도 화병에 꽂힌 몇 송이의 작은 꽃이 온 공간을 싱그럽고 화사하게 환기시켜 볼 때마다 미소가 지어졌는데 지는 꽃은 그에 비해 엄청난 하대를 받는다. 나는 내가 만들어서 보낸 꽃들의 끝을 알지 못한다. 어떻게 그 꽃들이 쓰이고 어디에 놓였는지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이고 그 꽃이 얼마나 피어 있었는지, 어떻게 버려지게 됐는지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다. 그 후의 일들이 그리 유쾌하지 않은 데다가 시들고 버려지는 일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서로 말을 삼가는 걸 수도 있겠다.
꽃이 시들기 시작하는 건 꽃의 의지와 마음이지만 그 끝을 정하는 건 결국 꽃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누군가 축하할 일이 생겨 꽃을 선물하자는 말에 '치우기도 번거롭고' 라며 다른 걸 제안하는 걸 보니 꽃이 진 후의 곤란한 마음은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닌가 보다. 나는 시들어 가는 꽃들이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무너져 변형된 줄기들, 잃어가는 꽃잎들과 그 옆에 여전히 곧은 꽃들이 섞여 만들어내는 조화를 지켜본다. 오히려 꽃이 시들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2주가 넘도록 시들지 않는 꽃을 보면 섬뜩한 기분이다. 그건 아마도 내 눈이 현대사회의 매끈한 표면에만 익숙해져 끝도 알 수 없고 조그만 흠집도 허락하지 않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시들어가는 꽃을 보고 문득 정신을 차리는 안도감일 수도 있겠다. 시드는 꽃을 마주하는데 일종의 용기가 필요한 시대에 살아가는 걸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