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문장 혹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하는 꽃

by 환희

5월을 앞두고 서울의 이런저런 장소들에서 꽃 수업을 기획했었다. 중순 즈음 코로나가 잠잠해지는 듯 해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다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며 모두 무산되었다. 모두가 서로를 위해 조심해야 할 때이니 이렇게 돼서 우울하다거나 허무하진 않다. 그저 바뀌어가는 현실 앞에서 온라인 강의 같은 단어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꽃 일을 계속해 나가는 의미도 다시금 되짚어 보고 있다.


프랑스에서 플로리스트 과정을 이수해 국가자격증을 취득했지만 꽃이나 식물을 재료의 탐구로서 예술 작업에 쓰기 위한 목적이 컸다. 지속적으로 해 온 아트테라피에도 점토나 물감을 쓰는 것처럼 꽃과 식물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연구도 하고 있다.

“꽃을 참 좋아하니까 이런 일도 하시고..”라는 말을 얼마 전에 듣고선 “저 꽃 안 좋아해요”라고 대답했더니 상대가 무척 놀랐다.

의외의 고백을 들은 것처럼. “저는 여전히 꽃이 대하기 어렵고 알아가는 중이에요”


이 작업은 서촌의 어느 공간에서 예정되었던 수업이었는데 어떻게 하면 꽃을 단순한 감상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창작의 재료로 활용하고 내가 이미 알고 좋아하는 것들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탐구이다.

책 - 문장을 좋아하니 꽃꽂이의 시작을 내가 좋아하는, 들었던, 간직하고 있는 한 문장 혹은 한 권의 책에서 나아가 보는 거다.

텍스트라는 활자 이미지를 꽃을 꽂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이 그리 쉽지만은 않아 나름 가장 난이도가 요구되는 4주 차에 넣었었다.


보통 선작업 - 후 제목 붙이기로 작업을 해 온 나는 이번에도 일단 고른 꽃들을 꽂았다. 이런 작업을 생각하고 고른 꽃 종류에서부터 다분히 내 의도가 들어간 걸 테지만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혹은 손을 완전히 놓은 후에야 그 의도를 분명하게 알아차리기도 한다.


정신분석가 이수련 선생님이 예술가의 작업 방식에 있어서 작업을 마치고 그 작업이 나에게서 분리된 대상이 된 순간에 일어나는 일, 그때의 나의 태도는 이전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했던 질문을 떠올려 본다.


작업이 끝나는 순간은 자신만이 알 수 있고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그 순간엔 분명 완성의 해방감과 분리가 되면서 겪는 허무 같은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 것 같다. 꼭 예술작업뿐 아니라 전반적인 일들,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를 끝마침에 있어서도 비슷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작업에서는 작업을 마치고 의도나 의미를 새로 생성한다기보다 미처 나도 몰랐던 숨겨진 의도와 동기, 의미 등을 작가 또한 완결된 작업을 앞에 두고 새삼 떠올리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 내가 만들어낸 거지만 그 작품을 앞에 두고 여러 날을 보내며 작품과 내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이 고되지만 흥미롭다.


이 ‘책꽂이’ 작업을 마치자마자 머릿속에 당연하다는 듯이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라는 몇 년 전 읽은 소설이 떠올랐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에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돋보기가 틀니 다음으로 아끼는 물건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밀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충분히 갖추었지만 수아르 족은 될 수 없었다. 모든 면에서 수아르족이었으나 동시에 수아르 족이 아니었다. 수아르 족이 아니었기에 일정한 시기가 돌아오면 그들의 부락을 떠나 혼자 지내야 했다. 물론 그에게는 서운한 일이었지만 수아르 족 인디오들은 차라리 그가 수아르 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은근히 반겼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와 다시 만나는 순간에 그간에 보고 싶었던 감동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가 수아르 족과 지낼 때는 연애 소설을 찾지 않았다.


긴꼬리원숭이나 금색과 녹색 깃털을 가진 앵무새, 형형색색의 독뱀들 같이 화려함에 눈을 빼앗기는 생물들과 사람을 덮을만한 크기의 우거진 초록들, 지독한 우기 속에서 자신의 허름하지만 단단한 오두막에서 수십 번을 읽은 몇 권 되지 않는 손 때 묻은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이 떠올랐다. 그는 여러 번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지키지 못했다. 임신하지 못하는 아내, 인디오 친구, 암살쾡이까지. 그렇지만 불쌍한 건 죽어가는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무지한 침략자들이라고 여겼다.


이런 밀림에서 연애 소설이 대체 무슨 대수인가 싶지만 엽총으로 매일 원주민이 죽어 나가고 모기에 뜯기고 보아뱀에 물려 죽었다 깨나고 턱이 빠질 것 같은 치통에 시달려 이를 뽑고 틀니를 하는 이 모든 지난한 나날 속에서,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서 할 일을 마치고 나면 여전히 연애 소설을 읽으러 간다.


이 밀림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그러나 쓸 줄은 모르는 노인만이 가진 특권이자 사랑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도시를, 지명들을, 행위들을, 헤쳐나가는 역경들을 상상하고 또 상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비친다. 연애 소설이라도 읽어서 이 지난한 삶을 버틴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오히려 연애 소설을 읽기 위해 이 삶을 기꺼이 살아 낸다고 여겨진다.


작가의 근황과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서 검색을 하던 중에 지난 4월 16일에 코로나로 작고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소설 속 노인과 비슷한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칠레에서 태어났지만 여러 나라를 거쳐 히혼에 정착했다고 한다. 히혼은 내가 항해 유람을 할 때 3일 내내 바다를 건너 처음 마주한 땅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 나온 노인이 청년일 때 부인과 정착한 약속의 땅인 엘 이딜리오를 발음 나는 대로 검색해 봤더니 ‘연애 관계’ ‘행복한 시기’라는 뜻이란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책꽂이 <연애 소설 읽는 노인> ©Fanny LEE


책꽂이 <연애 소설 읽는 노인> ©Fann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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