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arah Oct 23. 2021

Ep.2 - 정신력 찬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이른바 '정신력'으로 가능했던 경험을 한 적 있는지? 마흔 살에서 약간 모자란 내 인생을 쭉 돌이켜본다. 아! 한 가지가 떠오른다. 새내기 기자 시절 팀 회식에 가거나 취재원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술에 취해 정신을 잃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버티던 내 모습. 선배들은 '술은 정신력'이라고 했다. 취재원과의 술자리에서 마침내 살아남아 그 자리에서 알게 된 내용으로 단독 기사를 쓸 수 있었다는 어느 선배의 전설이 전해지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력'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취하면 안 돼!'라고 스스로에게 내적 채찍질을 심하게 한 날은 정말 덜 취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 하는 일들의 집합지는 역시 군대인 것 같다. 언제 어떤 환경에서든 나라를 지킬 수 있어야 하기에 다양한 훈련들이 사람들을 극한으로 내몬다. 평범하게 군 생활을 하고 제대한 이들이 주로 말하는 '극한'의 상황은 대체로 '화생방 훈련' '동계 훈련' '행군' '유격훈련' 정도가 있는 듯하다. 


대화 중 이런 이슈가 나오면 사실 그 뒤의 패턴은 대체로 유사하다. "와~씨, 그때 진짜 힘들었지."로 시작해 이야기만 들으면 저승사자와 하이파이브라도 할 뻔한 장대한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그러고 나서는 그래도 악으로 깡으로 어떻게든 버텼다는 훈훈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군필자 여럿이면 조금 난감한 상황이 되는데, '힘들었음' 경연  대회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얘나 쟤나 뭐 비슷한 것 같은데 비슷한 이야기로 무엇을 인증받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모두가 "야, 그래 니가 제일 힘들었구나. 인정 인정. 대단하다 진짜." 이런 말을 듣기를 바라는 걸까. 


그래도 이런 류의 이야기는 재미있게 들을 수 있다. 결국 버텨냈다는 승리의 기억이기에. 자의로는 가고픈 생각이 없었던 군대에 징집된 힘든 상황에서 더 힘든 훈련까지 받은 군필자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어쩌다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면 나는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그 이야기는 대부분 군대 내 가혹행위에 관한 것이다. 모두가 '힘들었다'라고 똑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훈련 이야기와 달리 이 이야기를 할 때면 각자의 입장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 누구도 내가 가혹행위를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옆에서 본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본 것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별 것 아니라는 투로 가볍게 말한다. 그 별 것 아닌 것 중에는 자잘한 괴롭힘부터 가벼운 구타까지 포함되어 있다. 누군가 "그거 좀 심한 거 아니야?"라고 반응하면 그들 중 일부는 이렇게 말한다. "선임 그 XX가 좀 심하긴 했는데, 걔가 유난히 못 버티고 힘들어하더라고." 부조리가 정신력 뒤로 숨어버리는 순간이다. 


군인에게는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지, 부조리도 눈 감고 버텨야 할 의무는 없다. 까짓 거 2년만 버티지 뭐 하는 마음으로 눈 감았던 경험이 이후에도 부메랑처럼 반복될 가능성은 없을까. 평범하게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상식을 넘어선 상황이 펼쳐져 인지부조화가 일어날 때 선택의 순간은 온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묵묵히 버티는 것이 진짜 정신력이 강한 것일까? 몇 번만 눈감지 뭐. 남들도 다 그러는데.라는 생각으로 버티는 것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진짜 강한 정신력이 아닐까? 그때 나는 술자리에서 먼저 취해 뻗어버리면 선배들이 "000은 술이 약하네."라는 말을 할까 봐 두려웠다. 나약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두려워 악착같이 주는 술을 받아마시는 것을 택했다. 그때 나는 정신력 때문이 아닌 두려움 때문에 버틴 것 같다. 


나는 이제 '정신력'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힘든 건 힘든 거다. 안 힘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면 그게 최선인 거다. 모든 고민을 철저히 한 이후에도 버티는 것 말고 방법이 없다면 그때 '정신력'을 꺼내도 늦지 않다. 그리고 '못 버틸 만큼' 힘든 건 '안 버티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이전 02화 Ep.1 - 앞으로 나란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