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 11

by Far away from

상무님께 보고를 들어가면 항상 무표정이셨다. 그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준비한 말도 다 하지 못하고 급하게 말을 얼버무리다가 나오곤 하기 일쑤였다.


'휴.. 이번에도 준비한 말을 다 하지 못하였네..'


자책하며 돌아서는데 모 부장님이 상무님을 만나러 들어가는 것이었다. 무심코 상무님의 얼굴을 살펴보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든 사람을 만나도 표정이 없기로 유명한 무표정 상무님의 눈이 갑자기 피에로처럼 샐쭉거리다가 얼굴 근육이 씰룩거리더니 보지 못했던 각종 표정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오랫동안 깜빡이며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베텔규스가 초신성 폭발하는 장관을 목격한 사람처럼 그분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살고 있다. 오랫동안 거친 일을 하여 몸이 그 일에 맞게 돌처럼 굳어진 사람. 항상 승승장구하여 자신감이 가득한 사람 등등.. 겉으로 보기에 정말 다른 존재라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결국엔 비슷한 인간이다. 자신의 감정을 나누고 싶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결핍에 대해 인정받고 칭찬받고 이해받고 싶은.. 인간. 그 점에서 그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이곳은... 내... 젊은 시절을.. 바쳤던.. 삶의 터전이자.... 놀이터... 였습니다''


이깡다구 소장님이 미국으로 떠나시기 전 환송회 자리에서 소장님은 눈물이 나와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15년 이상을 몸담았던 조직. 자신이 만들어 놓은 깡다구 월드를 떠나는 것이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깡다구 소장님의 눈물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막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으나 보는 내 가슴도 왠지 모르게 울컥해져서 눈물이 흐를까 하늘을 올려봐야만 했다.


깡다구 소장님은 직원 친화적인 사람이었다. 가면을 쓰거나 위선적인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특유의 영업 마인드로 거침없이 인권을 유린하는 순간도 많았고, 하지만 여린 성격 탓에 후회와 사과도 빨랐다. 성격이 급하다고 해야 할까?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감정을 오래 품고 있을만큼의 인내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 성격에 존경스러운 부분도 많았고, 친근하며 카리스마 있는 성격 탓에 많은 직원들이 어려워하며 흔들리지만 왠지 모르게 복종하게 되는 마법 같은 일들을 많이 만들어내곤 하였다.


어떤 사람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깡다구 소장님은 자신이 특별히 아끼는 직원에 관계된 일이라면 쉽게 눈물을 보이곤 했었다. 또한 자신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충성한 직원들의 충성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면서는 쉽게 눈물을 보이곤 하셨다. 갱년기가 되면서부터 더 눈물이 많아진 것일까?


오랫동안 집권했던 소장님이 가시고, 남은 직원들은 전에 없었던 깡다구 없는 깡다구 월드에 잔존했다. 그곳은 마치 핵폭탄이 터진 후 고요한 대기처럼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 못한 상태 같았다.


'회사가 까라면 까야지!'


깡다구 소장님이 자주 했던 말이다. 그 말처럼 깡다구 소장님은 회사의 의견대로 홀연히 이곳을 떠났으며, 남겨진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신의 의지가 아닌 회사나 다른 조직원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누군가는 떠날 것이고 누군가는 남을 것이며, 그 속에 모든 갈등과 기쁨과 아쉬움을 혼자 감내하며 또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노가다.

내가 선택한 곳.

하지만 떠날 날만 헤아리고 있는 곳.

내 성격상 그 어떤 직업을 선택했던 마찬가지였겠지만 난 퇴직 후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퇴직 후가 그리 내 마음대로 찬란한 빛으로 빛나고 있을 것 같진 않다. 내 몸은 늙어가고 있으며, 그때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을 것임이 예상된다. 또한 극한 상황에서 갈구하는 자유와, 주어진 자유를 누리는 상황은 전혀 다른 상황이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자유가 그리 달콤한 열매 맛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거.. 예측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하나의 인생을 살고 있으며, 매 시간 시간을 이유 있이 살았던 나에게 이유 없는 시간을 홀로 보내는 것. 필요하다. 그 시간에 내가 무엇을 느끼고 또 무엇을 행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난 또 이유 없이 그 시간을 꿈꾼다.


노가다. 내가 선택한 곳.

그래도 현장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순수한 그들이 내게 말을 걸 때 나는 많은 것들이 정리되는 느낌이 든다.

그 어딘가를 돌아다니며 일을 한다는 것이 내겐 만족이고, 사람 사이에 부대끼며 하는 일이 아닌 길을 걷고, 페이퍼가 아닌 유형의 결과물을 만든다는 것이 내겐 만족이다.


노가다를 시작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노가다는 내 '인생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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