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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저녁꽃 Dec 14. 2023

염천에 어디로

김성호 후배를 추모하며

염천에 어디로


“허이구, 호랭이가 잡아먹어도 모르겠더만.”


아마도 1990년도 안짝이었을 라나

안동 지나 봉화 산골짜기를 몇 개 넘어 춘양이라는 곳

자네 부친상에 다녀온 친구가 


이런 오지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간 것이 

호랑이에게 잡혀가는 것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차마고도 같은 고향을 떠나올 땐

송가인의 ‘서울의 달’ 가사처럼 성공해서 돌아오리라

검 하나 품고 진시황 처소 깊숙이 들어간 태자 단의 심정이었겠지.


“어대, 것도 장학생으로 그 큰 대학교 간 사람 이 근방엔 아무도 없쟈.”


나오지 말라고 해도 어머니는 버스 타는 신작로까지 허리춤 올리며 

우짜든지 공부 열심히 해서 너그 아버지…… 해야 하지 않겠는도……


마지막 말을 뿌리치며 맞이한 1985년의 봄은 추웠다.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니는 사회과학인지 뭔지에 기웃거리다

어느 날 맑스레닌주의자가 되기로 다짐했다고 하던가


다 지 운명대로 살아야 하는 기라

살아가는데 무신 과학이 따로 있겠는도

아이구 야야, 보도블럭 깬 거 저리 던져라


대기업 취직해 넥타이 메고 출근할 때가 좋았지

돌이켜보시게 그 시절이 제일 좋지 않았나

IT 붐이 일 때 직장에서 나온 뒤부터 일이 잘 안 풀렸제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결과는 모두 다른 것


여의도에서 고속터미널 앞 논술학원에서 두 번 정도 만났지

그게 자네 삶의 정오였어. 가장 뜨겁고 열정적이었던

연신 머리카락을 추켜올리며 ‘인생의 입시’를 가르치고자 했던


그때 나는 강단에 선 ‘착한 마르크스’를 보았네

그러나 그거 아는가. 맑스는 자본가 집안 출신이라는 걸

고로 자네는 사회주의자가 아닌 부르주아의 길을 택했어야 했어


“선배님, 현 상황은 어떤지요? 무모하게 밀어붙이는 건 아닌지 저으기 걱정되네요.”


2019년 8월 21일 자네가 나에게 보낸 문자네

나 역시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을 가고 있는 날들이어서 

자네의 걱정이 큰 위안이 되었네. 그리고 동병상련


“뜬구름 잡는 몽상 수준이라 말하기 뭐하네요. 계속 원점에서 맴맴 도는 거라 ㅠ”


그러다 2년 전 내가 책을 하나 냈다고 하니 

“85 단톡방에도 소개했으니 좋은 결과 기대해요”를 끝으로 소식이 없다가

오늘 자네가 직접 보낸 톡으로 자네의 부고 소식을 들었네, 세상에나


그 동안 힘겨운 세상 살아가느라 고생이 많았네

주먹 쥐고 태어나 숨을 다 할 때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던가


춘양 사과꽃 피었다 지듯

나무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이르는 그 길이

핑그르 도는 그 짧은 순간이 우리네 삶이니, 내려놓으세


사과나무 등걸에 앉아

꽃 흩날리고 햇사과 막 익어갈 무렵이

우리가 만난 인생의 자정과 정오였네

그리고 우리 큰애 논술 잘 가르쳐줘서 정말 고마웠네


빛이 보이거든

그 길을 따라 쭉 가시게

8월 염천이라 그대 가는 길 춥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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