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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Sep 23. 2020

전화위복, 캐나다 입국심사

6개월 비자를 요청했는데, 3개월 짜리가 됐다가 2년 반 짜리가 됐다.


“No! why? why three? I pay six! 

(아니, 왜 3개월만 주는 거예요? 나는 6개월을 등록했는데!)”

      

나는 벤쿠버 공항 입국 심사장에서 잔뜩 겁먹은 얼굴로 심사관에게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물론, 완전 콩글리시로.          




첫 어학연수, 비행기를 놓쳤다.


2009년 가을, 나는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아무리 학원을 다니고 스터디도 하고, CNN 잡지를 구독하고, 심지어 복수전공으로 영문과에 들어가 봐도 영어는 늘 끔찍하기만 했고, 지치지도 않고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아주 야무지게 내 길을 방해했다. 고등학교 3년, 재수 1년도 모자라서 대학교 3년 반 내내 날 괴롭혔고 아마도 아주 높은 확률로 대학 졸업 후에도 나를 괴롭힐 게 뻔한 영어가 너무 지긋지긋해서 정말 사생결단을 낸다는 마음으로 최후의 수단, 어학연수를 결정했다.      


 부모님과 눈물의 작별을 한 뒤 12시간을 날아서 벤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빅토리아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기만 하면 된다. 빅토리아에서 3개월, 벤쿠버에서 3개월씩 어학원을 다니기로 했는데, 학원 시작을 빅토리아에서 하기로 해서 우선 벤쿠버 공항에서 비자를 받은 후 환승해서 빅토리아로 들어가야 했다.

     

비행기 환승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반 정도. 지금 같았으면 비자 심사와 환승까지 하기에 두 시간 반이 상당히 빠듯하다는 것을 아니 비행기 표를 조금 여유 있게 끊었겠지만, 그때는 해외여행이 익숙하지도 않고 비행기 환승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몰랐다. 지하철이나 버스환승 생각하며 덜컥 그 표를 샀더랬다. ‘갈아타는 데 2시간 반이면 충분한 거 아냐?’ 하면서.     


입국 심사 줄에 서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줄이 끝도 없이 길었다. 

1시간, 1시간 반, 2시간......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봐도 줄이 줄어드는 속도는 너무 더뎠다. 결국 환승시간이 다 지나갔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놓쳤다. 머리가 멍했다.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정신 놓고 어어, 하며 줄에 실려 다니다가 겨우 입국 심사 테이블에 닿았다. 입국 심사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것저것 질문을 하더니, 뭔가를 달라고 했다. 정확히 뭘 달라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가지고 있는 서류를 몽땅 주었다.      




억울한 입국심사스팩터클한 환승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심사관이 “빅토리아에 3달, 벤쿠버에 3달 있을 거라고?” 물었다. 냉큼 맞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서류 한 장을 들이밀며 “그런데 왜 빅토리아에 있다는 학원 인보이스가 벤쿠버 주소야?”라고 되물었다. 

자세히 보니 정말 주소가 벤쿠버로 되어 있었다.


그건 유학원에서 준 서류였는데, 내가 등록한 빅토리아 어학원에 학원비를 내면서 받은 인보이스였다. 그 학원은 캐나다 전국에 체인이 있었고, 아무래도 벤쿠버가 빅토리아보다 훨씬 큰 도시이다 보니 벤쿠버에 있는 학원에서 빅토리아 학원의 행정 업무 일부를 처리하는 것 같았다. 아마 내 인보이스도 그런 식으로 처리된 것 같았는데, 그런 사정을 내가 영어로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랬으면 여기까지 비행기 타고 와서 이 긴 줄에 3시간이나 서 있을 리가 없잖아요, 입국심사관님.     


아는 영어를 총 동원한 콩글리시에 진솔한 표정, 다급한 손짓 발짓까지 하며 최대한 설명하려고 했지만 심사관은 냉정하게 3개월만 인정된다며 3개월 입국 비자를 발급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난 이미 6개월 치 학원비를 냈어요! 서류는 유학원에서 준 걸 그대로 들고 온 건데 3개월만 주면 어떻게 해요?” 라고 잘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 입에선 “why three? I pay six!” 같은 어설픈 영어만 튀어나왔다. 


물어보는 내 얼굴이 너무 간절했는지 -혹은 억울했는지-, 그 입국심사관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그럼 들어가서 연장하든가.”      


그리곤 바로 내 다음 사람을 불렀다. 더 말을 붙일 새도 없었다. 다음 사람이 테이블 앞에 섰다. 나만큼 오래 줄을 섰을 남자가 나를 슬쩍 쳐다보곤 심사관에게 자기 서류를 내밀었다. 억울함에 입이 한껏 벌어졌지만, 누구도 나를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3개월 달랑 찍힌 비자를 들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입국 심사실을 나섰다. 억울하고 답답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빅토리아로 가는 비행기를 알아보러 환승 카운터에 갔더니, 직원이 다시 한 번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빅토리아라... 어? 그거 마지막 비행기가 곧 출발하는데? 얼마 안 남았어!” 뭐라고요?! 나는 제대로 놀랄 틈도 없이 뛰어야했다. 도합 60kg 가까운 짐을 올린 수레를 미친 듯이 밀며 환승 게이트로 달렸다. 숨이 턱 까지 차도록 달린 끝에, 나는 겨우 마지막 비행기를 잡아탔다.      




바짝 쫄아서 다시 시도한 비자 신청


간신히 빅토리아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홈스테이 아주머니도 만났다. ‘아, 이제 다 끝났어. 무사히 도착했어!’ 안심이 되니 웃음이 나왔다. 이제 짐만 찾아서 차에 실으면 되는데, 세상에. 이번엔 짐이 안 왔다. 짐이 사라지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경험했다. 아니, 분명히 빅토리아 오는 비행기에 실었는데 어떻게 안 올수가 있지?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든데, 캐나다 하늘은 사람 속도 모르고 왜 그렇게 예쁘던지.      


다행히 짐은 며칠 뒤 하숙집으로 도착했지만(바퀴가 깨져서 왔다), 나에겐 비자 문제가 남아있었다. 학원비는 6개월 치를 냈는데 체류기간은 3개월인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3개월 학원비를 환불받자니 환불 가능한 금액이 너무 적었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학원 상담실과 함께 다시 비자 신청을 준비했다. 


비자 결과가 워낙 복불복이라고 하고, 당시 캐나다 비자 심사가 아주 엄격하게 변했다는 소문이 많아서 걱정스러웠다. 6개월 달라고 했더니 3개월 줬는데, 3개월만 연장한다고 신청 했다가는 왠지 그냥 나가라고 할 것 같았다. 이미 매우 불운한 입국 심사를 한 번 겪었기 때문에 겁을 잔뜩 먹고 학원 등록 기간을 연장하면서까지 최대한 긴 기간을 신청했다. 이때 학원의 권유로 이름도 생소한 코업 비자로 신청했는데, 공부와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비자라고 했다.     


사실 신청한 대로 비자 기간이 다 나오는 건 바라지도 않았고, ‘제발 등록한 학원만이라도 다 다니게 해 주세요. 가능하면 학원 끝나고 한 달 정도 여행을 할 수 있는 기간이 붙어 있으면 더 좋고요’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웬걸. 이번엔 기간이 엄청 길게 나왔다. 그렇게 나는 캐나다에 2년 반을 체류하게 됐다. 달랑 6개월 어학연수 가려던 게 갑자기 엄청난 장기 프로젝트가 된 것이다.      


길게 나온 비자 덕분에 나는 원래 계획보다 훨씬 오래 캐나다에 체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기간은 내 삶에 아주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비자의 취지에 맞게 공부도 열심히 하고 봉사활동과 인턴십, 계약직 취업까지 다양한 경험도 했다. 좋은 친구를 만났고 무엇보다 캐나다 사회의 다양한 면도 살펴볼 수 있었다.  

   



비자 덕분(?)에 진로가 바뀌었다


캐나다에서 경험한 여러 사회의 모습 중에 나에게 가장 낯설고 신기했던 것은 바로 ‘이주’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결혼 이주 여성과 그 가정에 대한 논의들이 막 시작되고 있었고, 학교 수업 시간에 관련 주제를 몇 번 접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 관련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직접 경험할 일이 거의 없다보니 별로 실감나지 않았다.      


그런데 캐나다에 오니 달랐다. 어느 날 TV를 켜니 뉴스 속보에 커다란 난민선이 나왔다. 난민선이 캐나다 해안에 나타난 것이다. 장소도 내가 사는 지역에서 멀지 않았다. 스리랑카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 TV에서는 연일 이와 관련된 뉴스가 이어졌다. 항구에 난민선이 들어온다니, 상상도 못 해본 뉴스였다. 내게는 막연하고, 문헌으로만 접하던 지식이 캐나다 사람들에게는 아주 생생한 현실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캐나다 사회가 이런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해졌다. 집 근처에 있는 이주민 지원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인턴십을 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주’라는 현상에 생각보다 다양한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이슈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결국 사람들의 이동에 대해 공부하겠다며 대학원까지 진학하게 됐다. 이렇게 캐나다 장기 체류는 내 진로도 바꿔 놓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일의 시작은 바로 그 당황스럽고 답답하던 벤쿠버 공항 입국심사였다. 문제없이 6개월 비자를 받았다면, 나는 정말 6개월간 어학원만 열심히 다니다가 집에 돌아왔을 거다. 영어야 좀 늘었겠지만 자원봉사를 하지도 않았을 거고, 인턴십도 없었을 거고, 멋진 박물관에서 일하는 경험도 없었을 거다. 이주 현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도 않았을 거고 사람들의 이동에 대해서 공부하겠다고 런던까지 가지도 않았을 거다. NGO에서 일하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을 거고 말이다. 입국심사 받을 때는 그 심사관이 참 야속했는데, 지금 보면 덕분에 좋은 경험도 하고 영어도 늘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진로에도 영향을 받았다. 이 정도면 그때 그 심사관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정도다.     




삶에는 종종 계획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나 당황스러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작게는 타려고 했던 버스를 잘못 타는 것부터, 비행기를 놓치거나 열심히 계획하고 오래 준비한 일이 무산되는 경우까지 아주 다양하다. 나처럼 6개월 해외 체류 계획이 갑자기 3개월이 됐다가 2년 반이 됐다가 할 수도 있다. 물론 버스를 잘못 탄 걸 깨달으면, 비행기를 놓치면, 계획이 무산되면 당연히 당황스럽고 짜증난다. 때로는 무섭고 슬픈 감정도 든다.    

  

이제는, 그럴 때 당황한 마음에 상황을 너무 크게 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덜컥거리는 마음과 달리 생각보다 그 일은 그리 큰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보면 당시 내 상황도 그렇게 큰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서럽고 당황스럽던지. 심장이 정말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영어랑 사생결단 내겠다던 굳은 각오와 어학연수를 준비했던 노력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어학연수 괜히 왔나봐’, ‘뭔가 잘못된 건 가봐, 다 접고 돌아가야 할까?’ 같은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그럼에도 겨우 마음을 잡고 비자 연장으로 마음을 돌렸던 건 다시 생각해도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낙담과 좌절의 순간에도 여전히 삶은 끝난 게 아니고, 우리의 길도 계속 이어진다. 일이 틀어진 것 같다고 모든 걸 다 집어던지지 말자. 상황에서 눈을 떼고 서 있는 자리에서 바로 앞, 딱 한 발자국 앞에 집중하자. 바로 다음에 해야 할 것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그 상황은 지나가고 조금 더 성큼 성장해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길 끝에서 상상도 못한 멋진 선물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그건 멋진 모험이나 최고의 친구일수도 있고,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일 수도 있다. 어쩌면 가슴 뛰는 꿈을 찾게 될 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생각보다 그 상황을 잘 지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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