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의 Craigdrroch castle에서 일할 때, 종종 기념품점 업무에 투입되곤 했다. 기념품점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좋았다. 언제나 따뜻하고 즐거운 음악이 흘렀고, 넓은 창으로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가게 내부에는 엽서, 자석, 작은 티스푼 같은 전형적인 기념품들뿐만 아니라, 오래돼 보이는 나무 상자와 커다란 자물쇠, 오색 스테인드글라스 장식품, 번쩍이는 힙플라스크(휴대용 술병), 무쇠로 만든 작은 쥐, 메이플 나무와 로즈우드로 만든 팬, 미니어처 티 세트 같은 다양한 기념품이 잔뜩 모여 있었다. 기념품 하나하나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매니저가 가게를 보기 어려운 사정이 생기거나, 손님이 너무 몰려서 도저히 혼자서는 가게를 볼 수 없을 때면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그럴 때면 신나서 기념품점으로 달려갔다.
카운터에 서 있으면 관람을 마친 사람들이 기념품점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인다. 사실, 그렇게 들어오는 손님들 표정만 봐도 이 사람이 성을 잘 둘러봤는지 아닌지를 대충은 알 수 있다. 막 탐험을 마친 모험가처럼 얼굴이 상기되어 들어온다면, 그 손님은 퍽 만족스럽게 관람을 마쳤단 거다. 나는 그 표정을 보는 게 참 좋았다. 특히 오디오 투어 기기를 대여했던 사람들은 기기를 반납하면서 꼭 ‘정말 3층에 귀신이 나오나요?’, ‘벽은 어떤 나무를 쓴 건가요?’, ‘1층 응접실 장식은 정말 금인가요?’ 같은 추가 질문을 하며 날 즐겁게 했다.
관람을 마친 사람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기념품들 사이를 누빈다. 기념품을 고르는 얼굴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나는 손님들이 기념품 고르는 모습 보기를 즐겼다. 우선 기념품을 고르는 그 설렘 가득한 표정이 좋았고, 사람들이 선택하는 기념품을 보면 그들이 어떤 부분을 인상 깊게 관람했는지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손님들이 느꼈을 여행의 설렘과 행복을 나도 살짝 공유한 기분이 들었다.
손님과 기념품
자연스레 사람들이 많이 사는 기념품도 알게 됐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무당벌레나 잠자리 모양 기념품을 좋아했고, 골무를 모으는 사람도 많았다. 성을 꼼꼼히 구경하고 나온 사람들은 나무 팬이나 무쇠 장식품, 미니 티 세트 모형 등에 관심을 보였고, 성의 내부 장식과 비슷한 빅토리아 시대 느낌의 물건에 관심을 보였다. 남자 손님들은 큐빅이 장식된 힙플라스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금 고가이긴 하지만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스탠드 조명과 벽걸이 장식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종종, 기념품점 안에 틀어놓은 음악 CD를 사 가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성의 분위기나 역사적 배경과 연관되는 음악을 틀어놓곤 했지만, 가끔은 아프리카 음악처럼 전혀 상관없는 음악을 틀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절로 흥이 나는 음악에, 관광객들과 함께 어깨춤을 추며 놀다 보면 덜컥 그 CD를 사 가는 사람도 있었다. 낯선 나라의 기념품점에서 동양인 여직원과 어깨춤을 춘 기억이 신기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대부분의 손님이 자기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기념품을 고른다. 그러면 곧 고른 물건을 가지고 계산대로 오는데, 나는 계산대에서 보는 손님들의 얼굴도 좋아했다. 대부분 엄청 고민해서 한두 개를 고르는데, 그렇게 하나를 집어 들고 올 때의 얼굴이 참 귀엽다고나 할까? 설렘과 결심, 아쉬움과 즐거움이 막 뒤섞인 얼굴을 하고선, 막상 계산할 때가 되면 아까 고르려다 만 다른 물건이 아쉬워 또 뒤를 돌아본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고, 계산한 물품을 잘 챙겨가는 뒷모습을 모면 괜히 뿌듯했다. 기념품을 고르는 순간도 여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의 여행에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즐거움을 선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나도 절로 신이 났다.
기념품만 사는 사람들
물론 항상 즐거운 일만 있는 건 아니다. 가끔은 보기에 안타까운 손님들도 있다. 성의 이야기와 내부 유물, 장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냥 습관처럼 기념품을 사러 온 사람들이나 기념품에만 너무 집중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기념품이 많이 팔리고 수익이 나면 박물관 운영에 도움이 되니 고마운 일이지만, 이왕 멀리까지 여행을 왔다면 좀 더 이 성의 멋진 모습을 즐기고, 다양하고 신기한 이야기들을 알아 가길 바랐다.
Craigdarroch Castle은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구역은 던즈미어 가문 사람들이 사용하던 생활 구역과 사용인들이 지내던 사용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계단도 많고, 방마다 당시 유물들로 가득 차 있어서 성을 다 돌아보려면 최소 40분에서 길게는 몇 시간씩 걸린다. 그런데 이를 다 무시하고, 성을 10분 만에 주파하여 기념품점에 도착해서는 수집하듯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저택에 얽힌 이야기와 유물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투어 비용은 아깝다면서도 기념품점에서 탄산음료나 주전부리를 잔뜩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들만의 여행 스타일이 있을 거라 여기면서도 자못 마음이 씁쓸했다. 저 안에 정말 멋진 구경거리와 이야기들이 잔뜩 있는데, 조금만 더 둘러보시지.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들에게 Craigdarroch Castle은 그냥 4층짜리 건물과 작은 기념품점으로만 남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성에 왔었다는 것을 잊을지도 모른다. 성에 얽힌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성은 전혀 둘러보지 않고, 뒷문으로 기념품점에만 들르는 관광객들도 상당히 많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기는 아깝지만, 그래도 기념품은 사 가려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왜 기념품점에 나무 제품이 많은지, 창에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을 달았는지, 왜 판매대에 낡은 자물쇠와 상자가 있는지 등을 전혀 알 수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모으는 기념품을 여기서도 살 수 있는지, 도장 찍듯 여기를 다녀왔다는 표시를 해 줄 수 있는 물건을 모으는 데만 신경을 쓴다. 그렇게 산 물건들은 기념품이라기보다 그냥 확인 도장 같다. 이곳에서의 시간과 감정, 추억을 기념하기 위해 물건을 샀다기보다, 그저 그곳을 지나갔음을 확인해주는 정도의 기능을 하는 출석 확인 도장 말이다.
기념품점만 들르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종종 기념품점의 상품 구성에 불만을 표한다는 것이다. 구비되어 있는 기념품들은 대부분 성의 내부 장식이나 역사적인 사건과 연관성이 있는 물품들인데, 이와 상관없이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일반 기념품점에서 취급할 법한 물건들을 찾는다. 깃털이 달린 드림캐처나 무스(Moose) 인형, 캐나다 원주민들의 토템 무늬 장식 같은 것 말이다.
가장 당황스러웠을 때는 코끼리 모양 기념품을 찾는 관광객을 만났을 때였다. 뚱한 얼굴로 코끼리 기념품은 없냐고 물어보더니, 없다는 말에 일행과 잔뜩 불평을 늘어놓았다. 성에는 코끼리를 연상시킬만한 물품이 없었기에 기념품점에서도 이를 취급하지 않았다. 물론 성의 4층, 엔터테인먼트 룸의 포켓볼 대에 놓여있는 하얀 공은 당시 사용하던 상아 공을 재현해 놓은 것이지만, 이런 내용은 안내판에 없기 때문에 안내 직원이나 자원봉사자들 붙잡고 물어봐야만 알 수 있다. 기념품점으로 바로 들어왔던 그 사람이 이를 알고 코끼리 기념품을 찾았을 것 같지는 않다.
기념품 보다 경험
기념품은 여행의 순간과 추억을 기억하게 해 준다. 구입 자체로 큰 즐거움이고, 여행을 행복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기념품 구입도 여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기념품에만 집중하다 보면 여행을 떠나온 목적을 소홀히 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여행을 결심하고 떠나올 때 느꼈을 설렘은, 분명 기념품 구입 그 이상의 어떤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 테다.
여행을 가면 종종 경비가 빠듯해서 입장료나 체험비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고, 멋진 기념품에 마음을 빼앗길 때도 있다. 어쩌면 부탁받은 기념품이 있어서 그걸 사는 게 가장 중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기념품보다도, 직접 경험한 순간과 추억이 그 여행을 우리 안에 더 오래 남게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누군가 “가장 좋은 기념품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경험”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 어떤 기념품보다 여행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 바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