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기 위하여
사람이 입는
옷에는
저마다 다른 삶의 추가 달리는 것 같다.
사실 요즘은 '추'를 보기 어려워져서 '추'라는 단어 자체가 낮설 것 같다.
추는 사진 속 오래된 저울처럼
한쪽에 무게를 재고 싶은 물건을 올려두고
다른 한쪽에는 계량된 무게추를 올려 수평을
맞춰 무게를 재던 기구이다.
삶의 추가 달린
저마다의 옷이란 이 괘변같은 이야기는
바르셀로나 현대 미술관에서
처음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만났던 작품의 이름과 작가명을 적은 캡션을 당시에도 찾지 못했기에.. 부끄럽지만,
작품의 이름도 작가명도 모르는 작품을 소개하게 되었다.
굳이 이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는
보는 이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는 듯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 물론 이건 개인적 견해이다 )
*** 직접 찍은 사진이나 작품을 찍은 것이기에
혹시라도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미술작품에 대한 느낌은 온전히 보이는 이의 몫입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작품이 떠올리게 해준 이미지나 이야기를 말하고자 작품 이미지를 첨부하였습니다.
작품이나 작가의 의도를 임의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니 노여워 마시고 읽어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1
바르셀로나 현대 미술관에서
본
남루한 코트 앞단 끝에 작은 망치, 그리고
한쪽 소매 끝에는 추가 달려 있던 작품이다.
보는 눈이 시간이 흘러 달라졌는지..
이 작품을
사진으로 다시 마주하니,
오늘은 달라질꺼야를 매번 외치지만 변하지 못하는 '익숙함의 노예'같은 모습이 떠올랐다.
쳇바퀴 같은 일상을 탈피해야지 하면서도
도전을 주저하는 모습이
작은 망치모양 추에 투영되어서 저 코트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걸을 때마다 저 코트 앞자락의 달린 망치가
다리를 휘감아 제 속도를 내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어찌보면 다 변명같지만..
탓하기에는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
변화를 실행에 옮기려
결정하는게 왜 이리도 힘든 건지 모르겠다.
피터 드러커
피터 드러커에도
결정은 어려운 행동이었나보다. 그 결정을 실천으로 옮기는 방책을 만들라는 말을 했으니 말이다.
변화는 쉽지않다.
변화는 어렵다는 걸 인정하고
'실천을 위한 방책'을 세우는 시간이 가지면 추가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
# 2
이 작품을
바르셀로나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다른 느낌이었다. 10대시절 들은 슬픈 이야기에 사로잡힐 정도 꼭 맞아떨어지는 작품이었다.
당시는 IMF로 한국 여행객을 상대로 하는 한인 이민자들의 피해가 커져 가던 시점이었다.
그 시절 그곳 한인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그 도시 유지이던 아저씨가 IMF여파로 엄청난 손실을 입은데다가 사기까지 당해 몸싸움을 하다 흉기로 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간 사건이 있었다.
(흉기가 망치같은 공구라고 들었었다)
그 아저씨에게는 20대 중반의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아주머니들은 매일 수근거렸는데 내용은 하나였다.
그 집 딸 어쩌냐고..
이제 시집은 못가겠다고 말이다.
다시 이 작품을 마주하니
그냥 그 아저씨가 가장의 무게를 이겨내다 못해 초례한 불행이
저 코트 한벌에 망치와 추로 달려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참 서글프게 느껴졌다.
그후에
아저씨의 딸은 남자에게 사랑 받으며
누군가의 딸로 치부되지 않고
온전히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
시간이 약이란 말은 너무 잔인하다.
슬픈 시간은
더디게 흐르기 때문이다.
IMF가 이제는 잊혀진 일 같지만
아직도 그때 드리워진 삶의 추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녀와 그녀 아버지의
삶의 추가 조금이라도 덜어내졌기를 바래본다.
# 3
먹먹해진 기분으로 과거에서 헤어나와
4벌의 옷이 연작처럼 놓여진 곳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마주한
바지밑단에 큰 쇳덩어리 추가 기워진
옷 한벌인 작품이 있었다.
이 작품을 보고 있자니
문득 부모님이 떠올랐다.
가장으로 또 따스한 모성으로 후퇴할 수 없는
매일매일을 보내는 그 걸음이
얼마나 무거울까란 생각이 들었다.
출근할 때 입어야만 하는 그 옷이 얼마나
무거울까 하고 말이다.
혹시 내가 아직 어린애처럼
부모님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건 아닌가란
생각도 흠칫들었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를 보면
자식을 하나 낳아서 기른다는 것의
삶의 무게는..
저 옷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일 것 같다.
우리가 다 모질고 나쁜 사람이라서
아이를 안 낳는게 아닌데..
바지에 달린 추를 덜어 줄
방책이 하루 빨리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
우리 부모님도
예비 엄마 아빠들의 발걸음도
한층 가벼워질텐데 말이다.
# 4
글을 쓰기위해 사진을 보던 중
바지단과 비슷하게
소매에 많은 쇳덩어리 추가 기워진
옷 한벌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지금 보니 이건
부쩍 결정이 어려워진 '나'를 보는것 같았다.
요즘 소위 말하는 의사결정이란걸 늘 해야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수없이 많은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싸인을 해야할 때마다
내 옷소매에.. 추가 늘어나는 것 같다.
...
수능 시험 보는 고3이나
고시나 공무원 시험 보는 이들처럼
내가 해야하는 결정이 이들처럼 일생일대의 순간을 결정 짓는 정도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일이라
매일밤 이리도 손목이 아픈가 싶다.
# 5
사진 속 작품처럼
비슷비슷한 옷을 입고 일상을 살아가는
제각각의 삶의 무게를 단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저들 중 누군가는
7전 8기로
면접에 도전하는 취업준비생일 것이다.
그 옷에는 도대체 몇개의 추가 달려 있을까 ?
정년퇴임을 준비하는 중년 신사도 있을 것이다.
빛바랜 수트에는
그간 얼마나 많은 추를 달았다가 빼는 것을 반복했을까 ?
추는
사실 두가지가 있다.
무게를 재는 저울의 '추'가 있고
시간을 재는 시계의 '추'가 있다.
시계추가 달린 시계 (벽시계, 뻐꾹이 시계)
우리 삶의 무게의 추를
시계의 '시계추'로 대해보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카이로스 (kairos) 의 시계추로 삶을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다.
잠시 설명하자면,
시간은 두가지가 있는데
카이로스 & 크로노스이다.
이 두가지는 모두 그리스어의 '때' 혹은 '시간'을 말한다.
카이로스(긍정적)는 어떤 일의 발생을 순간을 기준으로 기억하는데 적절한 순간이나 기회를 뜻한다. 생일이나 휴가, 노력으로 무언갈 성취한 날처럼 그 순간으로 기억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크로노스 (부정적) 는 일정방향으로 시간이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의미하며 '시간의 냉혹한 아버지'라 불리는 크로노스신과 같다. 따분한 일상이라던지, 한 것도 없이 한해가 갔다는 말처럼 정처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말한다.
그러니
어차피 달아야 할 삶의 추라면
삶의 좋은 기억을과 긍정이 담긴 그 순간의 카이로스의 추를 저 작품들처럼
달아보자는 것이다.
크로노스의 추처럼 냉혹한 시간의 흉터같은
추도 어쩔 수 없이 달릴테지만 말이다.
좋았던 순간을 담은 카이로스의 추를 보면서 크로노스의 추 무게를
무시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도
무기력해질 때면
혹시 지금
냉혹한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익숙함에 노예로 살아고 있는건 아닌지 자문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재빨리 옷 매무새를 매만지고
스스로를 가다듬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지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살지는
우리 결정(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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