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스승 & 레이먼 카버의 대성당
사람들마다
그때
그 순간의
머물던 공기의 무게와
시계 초침의 째깍거림까지
생생하게 기억되는
'인생의 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내게 있었던
그런 순간을 소개하며 이 글을 읽는 이들이 한 번쯤 이 쉽고 간단한 '인생의 한 순간'을 느껴봤으면 좋겠다.
준비물은 오로지
연필과 종이 그리고 '자신' 뿐이다.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영국인 교수님인 린다를 만났던 순간은..
아주 짧은 빨간 쇼트커트 헤어에 마른 듯 늘씬한 몸매의 세련된 영국 할머니였던 린다는
아직도
내게
최고의 '인생의 한 순간'과
'인생 스승'으로
기억된다.
우린 모두 스무 살의
치기와 들뜸으로
린다와의 '패션 일러스트' 첫 강의를 시작했다.
그녀가 우리에게 요청했던
준비물은
스케치용 연필과 종이가 전부였다.
대부분의 패션을 전공하는
한국 학생들과 다르게
나는
입시미술을 배운 적이 없었고 나의 그림 실력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초보적일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린다의 수업은 내게 약간의 설렘과 압박감을 안겨주었다.
'이 수업을 들으면,
패션 일러스트를 잘 그릴 수 있겠지?'
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녀, 린다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와 친구들에게 린다는 어이없는 말을 내뱉었다.
패션 일러스트 첫 강의에서 눈을 부릅뜨고 그려도 모자랄 판국에
눈을 감으라고 하니..
아무리 에 내가 유학을 왔고
이 할머니가 영국인이라도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그런 우리의 당황함을 느꼈던지 린다는 몸소
한 손에는 연필을 들고 두 눈을 감고 지휘자처럼 허공에 선을 그리 듯 움직이며 다시 말했다.
스무 살의 치기와 들뜸은
있었지만 이미 고등학교 때 반항을 졸업한 우리는 어이없는 그녀의 말을 따라서 모두
그 순간
뇌가 뻐근해지면서
우리 모두가 생각했던 종이와 연필에 대한 개념의 분열하고
그것이 주는 촉각의
에 집중하게 되었다.
서걱서걱하는 소리와 연필 끝과 종이의 접점이 손가락 끝부터 손 그리고 손목까지
전해지는 그때가
'인생의 한 순간'과 '인생 스승'을 동시 만난 시간이었다.
'패션 일러스트는 이렇다'
라는 설명은 필요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연필과 종이를 느끼며 선을 긋고 나서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한 듯한 한숨을 내뱉었고
눈을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었다.
그리고
이 순간의 다음 단계는 레이먼 카버의 '대성당'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었다.
레이먼 카버는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 ‘리얼리즘의 대가’ 로 불리는 미국의 현대문학 작가이다.
특히 단편 소설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그를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인 '대성당'이 실린 단편집은 퓰리처상 후보에도 올랐었다고 한다.
그만큼 독자는 물론 평단에서도 높이 샀던 단편소설이다.
대성당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아내의 상처한 맹인 친구(남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던 남편의 이야기이다.
아주 서먹하고 어색한 그 순간에
마침 아내는 없는 데다가 TV에서는 '대성당'을 보여주는 프로가 나왔고
맹인이었던 이 남자는 볼 수 없는 대성당을 그려보고 싶어 했다.
남편은 겸연쩍게도 맹인 남자의 손을 자신의 손등에 포갠 채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맹인 남자는 남편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눈을 감고 대성당을 계속 그려보라고 했다.
눈을 감고 대성당을 그려본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글을 읽을 시간이 부족한 분들에게 레이먼 카버의 '대성당' 방송 부분을 추천합니다.
사실
눈을 떠야 제대로 된 일러스트를 그릴 수가 있다.
하지만
눈을 감고 그릴 땐 있는 그대로의 물성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성당처럼 외형과 성향 같은 것과 다른 촉각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는 것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존재한다.
사는 동안 우린 배움을 위해
종이와 연필과 가장 많은 접촉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며
사람과 가장 많이 부딪치고 동고동락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무리 말로 글로 소통하려고 해도
이해시키려고 해도 되지 않는 것들이 분명 늘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들 중 대부분은 그런 감을 배워본 적이 없는 게 사실이다.
'촉각 그리기'를
통해서 가장 친근한 것들의 물성을 이해함으로
스스로의 촉각적 감각을 일깨워 보면 좋겠다.
웃긴 표현이지만
눈을 감고 연필로 선을 그었을 때 난 내 손등에 난 솜털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소통하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면서도 그의 얼굴을 눈을 감고 '촉각 그리기'로 그려보면 좋겠다.
그와 대화하지 않고도 그리면서 속 마음을 토해낸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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