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중학교 1학년 봄이었다. 과학의 날 행사로 독후감을 써냈는데, 뜻밖에도 최우수상에 뽑혔다. 과학 선생님은 내 글을 도 대회에 내보낼 예정이라며, 잘 다듬어 보라고 하셨다. 그런데 막상 다듬으려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손을 대면 댈수록 글은 점점 엉켜만 갔고, 결국 며칠 만에 최우수상은 2학년 선배에게 넘어갔다.
자존심 상하고 상처받았지만 나는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었다. 독서도, 글쓰기 연습도 제대로 해본 적 없이 그저 우연히 잘 써진 글이었기에, 내 글을 지켜내지 못했다.
이후로 30년 가까이 살며 그 일을 떠올린 적은 없다. 그땐 글쓰기가 내 삶에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작가를 꿈꾸지도 않았다.
학교 다녔을 땐 수면제였던 책이 엄마로 살면서부터는 피로회복제로 바뀌어
꾸준히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이어졌다. 글감을 애써 찾지도 않았는데, 나의 일상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글감이 되었다.
시골에서 시부모님, 세 아이들과 한 집에서 함께 사는, 요즘 보기 드문 확대가족.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 가족의 일상은 하루하루가 역동적이다.
소소(小小)한 일상이 물수제비처럼 탕탕 튀겨지니 사는 맛이 다채롭다. 특별하진 않지만 소소(炤炤)하게 기억하고 싶은 내 삶이다.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했고, 벌써 4년이 넘었다. 그러다 보니 쓰는 것에 더 집중하고 싶은 마음에 브런치 스토리에도 눈독을 들였다.
2023년 5월 25일. 하루 휴가를 도서관에서 보내고 있을 때였다.
편성준 작가의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를 읽고 있었는데, ‘아, 브런치! 벌써 두 번이나 떨어졌는데… 또 한 번 도전해 볼까?’ 갑자기 스친 생각이었지만, 뭐에 홀린 듯 나는 무작정 글을 써 내려갔다.
2023년 새해 다짐이 ‘무엇이든 실천하는 해’였으나, 상반기가 거의 끝나가도록 난 뭐 하나 행동한 게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 글쓰기였고, 꾸준한 블로그 활동 덕분에 쓰는 게 두렵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지켜내지 못했던 내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날것 그대로 꺼냈다. 다른 사람의 경험담이 아닌, 나의 기억을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게 풀어냈다.
그랬더니 그 글은 나를 브런치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오롯이 내가 쓰고, 고치고, 다듬은 글이 세상에 놓였다는 것. 혼자만 읽는 글이 아닌, 누구나 언제든 읽을 수 있는 글이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로 된 과정 또한 의미가 있었다.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가는 시간들이 나를 더욱더 겸손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내 이름 옆에 붙은 ‘작가’라는 두 글자는 아직은 민망하다. 그러나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때까지 앞으로도 한 계단씩 나만의 글을 성장시켜 나갈 것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이 모두 글감이 되었다. 2018년 28개월 된 셋째가 급성림프모구성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 3년 4개월의 투병을 견뎌내며 배운 것들. 첫째의 전신 아토피를 근본부터 치료하며 깨달은 면역의 원리. 나 자신이 당뇨 고위험군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 터득한 건강의 진짜 의미까지.
그 순간순간은 고통이었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고독하고 고통스러웠던 과정에서 끌어올린 경험들이 돈으로 바꿀 수 없는 나만의 보물이 되었고, 이제는 그 보물이 빛날 수 있게 책으로 옮길 차례다.
경험의 깊이가 더해진 글로 지금도 병과 싸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위로와 통찰을 전하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의 글쓰기는, 내 삶을 떠받쳐 주는 기둥이 될 것이다. 더 이상 브런치 스토리의 ‘내 서랍’도 글을 가두어 놓는 그늘진 서랍이 아니다. 내가 꺼내고 싶은 글을 원할 때 꺼내는 나만의 글 창고다. 김장김치처럼 숙성시킨 뒤에 꺼내야 하는 글은 한동안 꾹꾹 눌러 담았다가 때가 되면 꺼낼 것이다.
이런 자유와 선택이 글쓰기에 책임감을 심어주고 나를 발전시킨다.
비록 중학교 시절엔 내 글을 지켜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만의 경험을, 나만의 언어로, 담백하게 풀어냈더니 그 글이 브런치에서 인정받았다.
이제 나는 바란다.
내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 머물기를. 짧은 문장 하나가, 고단한 하루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그리고 언젠가 이 글들이 모여 한 권의 책으로 나오기를.
그 책은 내 이름을 알리는 수단이 아니라, 내가 살아낸 시간을 기록한 마음의 흔적이 되었으면 한다. 나는 앞으로 내 글을 끝까지 지켜내고 키워낼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