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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성화 Aug 26. 2024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로 자기 세계에 한계를 둘 것인가?

언어가 곧 그 사람의 수준이다.

2008년 대학 4학년 때, 교양국어 시간이었다.

하이데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가 그 사람의 의식과 수준을 나타내는 정도로 알고 있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가 한 말인데 난 당시 교수님께 처음 들었다. 그냥 흘려 들었다면 전혀 기억에 없을 텐데 마흔이 넘은 지금도 뇌리에 콕 박혀있는 걸 보니 인상을 심어준 말임에 확실하다.


편입을 했기 때문에 4학년때까지 교양과목을 들어야 하는 부담은 있었다. 하지만 교양국어가 전공인 유아특수교과만큼이나 유익했고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생각이 날 정도로 그 시간이 즐거웠다. 김정아 교수님. 성함도 기억할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주신 분이었다. 일상에서 잘 못 들어봤던 말씀을 많이 하셔서 그걸 이해하려고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수업은 글을 써와서 발표하는 시간이 꼭 있어서 수강생들이 무척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물론 부담이었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재밌었다. 교수님의 입에서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말씀에 수업시간마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을 잘 못하는 나로서는 교수님이 무척 큰 사람으로 여겨졌고 철학자 같은 느낌도 들었다. 다른 세상의 사람을 만난 것처럼 충격이었고 부럽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과제를 발표할 때마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교수님의 피드백이 참 인상 깊었다.


한 번은 자기소개서를  써서 냈는데 오타 교정은 물론이고 한 페이지 여백에 빼곡히 써 주신 피드백을 보면서 감탄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친정 가서 찾아보면 나오긴 할 텐데…ㅎㅎ

형식적인 과제 검사가 아니었다. 나의 글이 꽤 흥미롭고 호기심이 생긴다는 평이었는데 그런 평을 들은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블로그도 하고 브런치도 하는 사람이 되었나 보다.


생각해 보니 내가 언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는 그럴 만한 환경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나는 결혼한 순간부터 시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상견례 때 지금의 시아버님께서 같이 살자고 하셔서 크게 고민 안 하고 그러기로 했다. 그런데 살아보니 어려웠다. 가장 어려운 게 남들이 보통 얘기하는 시집살이가 아니라 ‘언어’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 주변이 없어도 너무 없는 시부모님으로 인해 상처를 많이 받고 살았다.


시어머니는 그냥 평소 말투가 기분 나쁘게 들린다.

결혼 초에 제사가 있어서 식구들이 다 같이 모였던 날, 첫째 시큰어머니께서 밑도 끝도 없이 나에게


“나는 자네 시어머니랑은 말하기 싫네. 말하다 보면 기분이 나빠져서 통화도 하기 싫네.“라고 하시는 바람에 놀란 적이 있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은 너무나 공감 가는 말이 돼버렸다.


툭툭 내뱉는 말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그것도 모자라 큰소리로 “내가 틀린 말 했냐?”며 한 술을 더 뜨시는 분이 내 시어머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자는 게 아닌데 헛다리를 짚어 상대방의 불붙은 감정에 휘발유를 붓는 격이다. 평소 속정이 깊으면 뭐 하나!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속상하다. 어머님 본인이 사람들에게 말로 상처 주고 기분 나쁘게 하면서 정작 본인은 그걸 깨닫지 못하시니 그게 참 불쌍하고 안타깝다. 시골이라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충청도 화법을 쓰는 사람들인지라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대놓고 말 못 하며 뒤에서만 구시렁구시렁댄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는데, 교양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툭툭 내뱉지만 않으셨으면… 목소리가 크다고 설득력이 있는 게 아니라 조곤조곤 말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으셨으면 좋겠다.


시아버님은 결혼 12년 차인 나에게 지금까지도 OO엄마야, 애미야~ 같은 호칭도, OO야 처럼 내 이름도 한 번도 불러주시지 않았다. 사람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시고 호칭도 생략하고 공중에 대고 할 말만 하는 그런 식이다. 과거에는 어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얘기하는 게 버릇이 없고 예의가 없는 거라고 배웠을지는 모르나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심부름을 시키실 때도 마찬가지다.

호칭을 부르지도 않고 집 지키는 개를 부르듯 “어이어이“ 이런 식이다. 그러고는 명령하듯이 일을 시키신다. 내가 식사 준비를 하느라 손에 물이 묻어있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자기 심부름이 제일 급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그런 사람이다. 특히 상대가 아랫사람일수록 예의나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 시아버지다.  밖에 나가서 체면 차리고 예의를 지키는 만큼 집에서도 그렇게 해야 맞다. 시아버지를 헐뜯고 비난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혼하지 않는 이상 내 시아버지인데 나도 화나지 않고 스트레스받지 않고 잘 살고 싶다. 그러나 10년 넘게 같이 살면서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바뀌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변해야 할 것은 내 마음가짐이었고 그렇게 나는 나를 다스리며 살았다. 그래서 지금은 내 마음이 예전보다는 많이 편안해졌다.


어머님과 아버님을 보면서 언어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저렇게 말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말을 조심하고 가려서 하려고 노력한다. 아이들에게는 항상 어디를 가든 어른을 보면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인사하라고 얘기를 한다. 또한 자기 생각을 구체적으로 또박또박 표현하라고 말을 해준다. 잔소리가 되지 않게 내가 먼저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한다.


시부모님을 통해서 언어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표현하고 소통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남편은 평소에는 엄청 자상한 사람인데 화가 나면 아버님의 모습이 나타나 360도 다를 때가 있고 나이가 들수록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결혼 전에는 전혀 몰랐는데 살아보니 보였다. 그래서 기분 좋을 때를 기회 삼아 그러지 않기로 다짐을 받아낸다. 한 번으로 절대 고쳐지지 않지만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가족을 위해서 노력은 필요하다. 미룰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다.


재작년 겨울에 어떤 공무직 시험을 본 적이 있었다.

준비하지 않은 시험이었기에 유형이나 봐보자 해서 본 시험이었고 기출문제만 조금 풀어봤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시험을 보고 집에 왔는데 남편이 아버님께 말씀을 드렸는지 알고 계셨다. 붙을 가능성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말씀 안 드린 거였는 게 아버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시험 봤다며?
그러게 진작 좀 공부하지!

정확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듣는 순간 너무 황당했다. 내가 아버님 심경을 불편하게 해 드린 것도 없었는데 집에 들어오시자마자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쉽게,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셨던 아버님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시험 봤다면서?
직장 다니면서 일곱 식구 살림하느라
공부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시험까지 보느라 애썼다. 쉬어라!


10년 넘게 살면서 워낙 말주변이 없는 분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렇게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시험 봤다면서?
고생했다..


이 한마디면 될 것을…

꼭 그렇게 기분 나쁘게 말씀하셔야 했나??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라고 논리학, 심리•언어 철학을 다룬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도 이런 말을 했고

이 책에서 김종원 작가도 같은 표현을 했다.

나의 언어는 나의 세계다.

늘 오래된 사고에서 벗어나려고 분투하라.

내가 펼칠 수 있는 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살아갈 세계의 한계를 결정한다.


사람은 언어로 인식하고

언어로 기억하며

언어로 생각하는 동물인 것을…


김종원 작가는

한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는 그 사람의 수준이며, 우리는 자기 수준 이상의 언어를 세상에 내보낼 수 없다.

<중략>

우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자신의 언어 수준을 높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모르며 평생 얕은 사색에서 나온 못된 말만 하면서 미움만 받고 살게 된다.

고 했다.


시골에 산다고 말을 세련되게 못 할 이유는 없다.

속된 말로 가방끈이 짧아서 무식하게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 자기 하기 나름인데 사람들은 여전히 학벌을 중요시하고 학벌이 높은 사람은 유식하고 교양 있게 말할 거라고 인식을 하고 배움이 적은 사람은 무식하고 말도 잘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걸 깨트릴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사람은 끊임없이 정말 필요한 걸 배워야 한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말공부를 우리는 배워야 한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필요한 걸 배우는 게 진짜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가 언어다. 소통의 언어.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사행습인운(思行習人運)


상대방이 듣기에 기분 상하지 않으면서 내가 전하려고 하는 말이 잘 전달되는 것이 진짜 소통이다.


생각을 하고 말을 하면 그냥 내뱉어질 수가 없다. 말을 걸러서 잘 전달하려고 하면 내 행동만 바뀌는 게 아니다. 상대방의 행동과 태도도 바뀌지 않는가?

그러면 습관, 인격, 운명은 도미노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변화된다.


평소에 사용하는 언어가 그 사람의 세계에 한계를 긋지 않도록 생각을 하고 말해야 한다. 아기가 존댓말을 배우는 게 중요하듯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언어로 말을 하려고 어른 사람도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가정도 사회도 서로 존중하게 되고 인격이 바뀌고 운명까지 바뀌게 될 텐데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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