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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훈 Jan 16. 2019

엔더스 게임, 중용하고자 하는 피터팬 성장통

약육강식의 패러다임을 넘어...

'엔더스 게임'이 영화로 제작된다고 공개됐을 때 SF 마니아들 사이에는 큰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영화 개봉 소식을 통해 처음 접했고 원작에 대해서는 아예 몰랐다. 


엔더스 게임은 70~80년대 'SF 부흥 시기'에 쓰인 많은 걸작 중에 하나라고 한다. 이 시기에 왜 많은 과학소설이 씌었는지 따로 살펴볼 문제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 발표된 많은 작품들이 지금도 영화로 제작되고 있어 SF에 익숙하지 않고 관심조차 없는 많은 이들에게도 친근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의 하드 스타일 SF 작품은 원작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영화로만 볼 경우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고 엉뚱하게 해석할 소지가 많다. 또 SF의 특성상 시각 효과와 메카닉 디자인 등 눈에 보이는 것의 재현도 중요하기 때문에 제작비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자칫 그렇고 그런 액션 영화로 전락하면 원작자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는 가치관은 물론이고 스토리 자체도 재현하기 어렵다.




여기서 잠깐 SF 원작을 영화한 경우 하나를 소개하겠다. 나는 최근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를 영화로 보았는데 개봉 당시에 6개의 이야기가 미친(?) 듯이 전환되는 것과 각 에피소드 간의 내용 연결이 안 된다며 무척 어려워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미 원작을 읽은 나는 달랐다. 워쇼스키 남매(지금은 자매지만 당시에는 그랬다)의 이런 연출이 오히려 원작의 의도에 걸맞다고 생각했다. 


생략이 부른 난해함 - 영화 '엔더스 게임'


결론부터 말하자면 '엔더스 게임'은 과도한 시각 효과와 빠른 스토리 진행으로 좋지 못한 평을 듣고 말았다.

아서 C 클락이 쓴 SF의 고전이며 스탠리 큐브릭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 역시 명작으로 평가되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Space Odyssey)'는 당시로서는 최선의 시각 효과를 사용하면서도 내용이나 전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각색 SF 영화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는 어려워 보인다. 


솔라리스(Solaris), 1972년작과 2003년작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연출한 솔라리스(Solaris, 1972)와 스티븐 소더버그의 2003년 리메이크작을 비교해보는 것도 좋다. 전작은 너무나 지루해 나는 4번 모두 거의 졸았지만 전문가들의 평은 후해 원작의 의도에 매우 근접했다고 평가된다. 후자는 멋진 비주얼과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보여줬지만 전혀 다른 작품이 되었다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리메이크의 작품성이 많이 떨어진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원작과 다르게 러브 스토리가 됐다는 점이다. 엔더스 게임을 솔라리스의 경우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문제의 원인은 동일하다. 바로 관객들의 성향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흥행성에 대한 고려다.



보통 영화 '엔더스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은 3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사관학교 시스템, 지구인과 포믹스 간의 전쟁, 그리고 '살기 위해서 먼저 공격하자'라는 인식이 말해주는 약육강식 논리다. 둘째, 전쟁에 아이들을 사용된다는 것이다. 또 그 과정에 아이는 고뇌하고 상처받지만 결국에는 성장한다는 틀에 박힌 스토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용(中庸)'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중에도 '강자의 논리'나 '약육강식의 세상'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미 이건 현실에서 지겹도록 보는 것이기에 재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고 원작자와 연출자 공히 굳이 이런 흔한 주제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았을 것이라 예측했다. 대신 나는 '피터팬의 성장'에 잠시 관심을 가졌다. 아이들이 전쟁에 직접 참전하는 이야기는 건담의 뉴타입(New Type)을 비롯한 많은 사례들이 있고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상처를 입지만 그래도 성장한다는 에니어그램적인 전개는 보편적인 주제다. 


엔더의 사관학교 생활

이런 유의 스토리에서 늘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미성숙한 부분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이 함축된 것이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어떤 강하거나 초월적인 상대와의 갈등(아버지, 상사, 사령관, 어머니, 선생님) 또는 사도, 외계 침략자, 적군과의 투쟁을 통해 자신의 미성숙함을 이겨내고 성장을 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몇 주를 곱씹어 생각해보니 좀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더 깊은 통찰을 위해서는 원작부터 읽어야 할 테지만 일단 단초(端初)를 따라가봤다. 


극 중에서 엔더는 계속 고민한다.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아주 잘 알아야 하고 그래야 '적을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적을 너무 잘 알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포믹스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생도들의 훈련 도구인 마인드 게임에 포믹스 여왕이 등장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어떻게 지구연합에 개발한 군사용 도구에 포믹스가 침투할 수 있고 그런 수준이라면 '전쟁은 포믹스가 이긴 것 아니냐'라고 말한다. 이건 단순한 생각이다. 마인드 게임의 전개는 엔더가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결국 그 스스로 포믹스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마인드 게임에 포믹스가 등장하는 것이다. 마인드 게임은 그의 심리 상태를 관객이 들여다보는 영화적 장치인 것이다. 그 프로그램의 코드나 보안 등급 등을 따지는 것은 영화 감상에서 말 그대로의 '잉여(剩餘)'이다.

최후의 포믹스 함대

엔더는 래컴 대령이 포믹스의 모선에 자폭하는 장면에서 다른 생도들과 다르게 혼자 슬픈 표정을 짓는다. 다른 이들이 침공을 막아낸 것에 환호할 때 그는 래컴 대령이 죽음 직전에 느꼈을 감정을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는 심지어 자신의 섬멸해야 하는 포믹스의 심정까지 이해하려고 한다. 중용에 들어간 것이다. 중용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인데 가장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과 자세를 말한다.


중용이란


한 세대 전 지구인들은 포믹스의 침공으로 큰 고통을 당했고 심지어 멸종될 위기에 처했다. 따라서 엔더의 포믹스에 대한 중용은 인류의 일원으로는 용납 안 되는 것이지만 그가 함대 사령관으로 선택된 중요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그는 폭력적이지 않으면서도 순종적이지도 않다. 필요에 따라서는 상대를 속이기도 한다. 감정적이지도 않아 냉철하지만 간혹 냉혹하다. 또 동료들과 친밀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능력은 있으되 독선적이지 않은 그런 사령관을 원했던 그라프 대령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포믹스를 섬멸하자는 자신의 의도에 맞지 않는 중용의 인물을 찾았던 것이다. 그의 사전에는 '전쟁=승리'란 개념밖에 없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엔더 같은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방법. 그것이 선이던 악이든 간에 두르 두르 사용하는 대부분의 현실 인간의 상징이다.


여기서 잠깐 포믹스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포믹스가 지구를 침공한 후에 오히려 어이없이 당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엔더의 결정도 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해하기 어렵다.


영화에서는 앤더는 휴가를 얹어 먼 여행을 떠난다. 물론 비밀스러운 목적을 품고 말이다. 그런데 원작은 이 부분을 다르게 설명한다. 함대 사령관이 된 이후 앤더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형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존재감이 빈약했던 형의 폭력성은 다른 방향으로 성장한다. 영화에서는 퇴학당한것으로 끝나지만 원작은 다르다. 사관학교에 입학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일반인의 능력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형은 물론 누나도 평범한 청소년을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앤더의 형은 결국 언론을 장악해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엔더가 지구에서 멀리 떠난 것은 포믹스의 재건을 위한 것이지만 그의 선택은 더 많은 것으로부터 중용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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