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를 비추던 달빛 같은 사랑

by 정상가치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한 구절에서 '짝사랑'이라는 단어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잊고 있던 기억의 갈피가 바람에 나부끼듯, 나의 마지막 짝사랑이 문득 떠올랐다.


서른아홉, 마흔을 목전에 두고 나는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조급함이 관계를 좀먹는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였다. 결국 그 관계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일방적인 연락 두절, 나는 모든 것을 상대의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본디 인간이란 타인의 사소한 과오에는 엄격하고 자신의 거대한 실책에는 너그러운 법이니까. 돌이켜보면 나의 잘못도 분명 그곳에 있었으리라.


7월의 신랑이 될 것이라 공표하고 다녔던 학교, 행복에 겨워 그녀의 사진을 자랑하던 나를 기억의 저편으로 지우고 싶었다. 파혼의 상실감은 깊었지만, 차마 휴직할 용기는 없었다. 그 시절 나는 불필요할 만큼 성실했고, 동시에 한없이 나태했다. 근무 태도를 지적하는 교감 선생님의 조언에 "왜 저만 미워하십니까"라며 엉뚱한 항의를 쏟아냈다. 내막을 알면서도 사무적으로 대하는 그분이 그저 밉기만 했다.


그 후, 나는 학교 도서관의 유령이 되었다. 현실을 잊기 위해 활자 속으로 도망쳤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공강 시간 가리지 않고 책의 숲을 헤맸다. 자연스레 그곳을 지키던 사서 선생님과 말을 트게 되었다. 동그란 얼굴에 번지던 밝은 미소가 유난히 빛나던 분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녀 역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의 행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 사람을 만났더라면, 나의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살던 집을 비우고, 학교를 쉬고, 말없이 고향으로 도망치지는 않았을 테지. 전화도, 문자도, 카톡도 무응답으로 일관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녀의 행복을 가로챌 권리도, 계획도 내게는 없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하루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족했다. 다만,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재채기와 짝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처럼. 결국 나의 시선은 오해를 낳았고, 한쪽은 예비 신부, 다른 한쪽은 파혼남이라는 자극적인 가십 속에서 나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


사람의 마음이 종이처럼 쉽게 접히면 좋으련만. 잠적한 전 연인을 잊게 해준 그 마음은, 내게 새로운 고뇌를 안겨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는 것을. 한 사람으로 얻은 상처는, 다른 사람으로 얻는 미열로 희석될 수 있다는 것을.


같은 학년, 비슷한 시기에 연인과 헤어진 선생님이 있었다. 동질감이었을까, 자꾸만 관심이 갔다. 어느 날, 연구실에서 멍하니 있던 내게 그녀가 캔 음료 하나를 건넸다. 그 모습이 가여워 보였을까. 실은 도서관에 갈 수 없어 책을 못 보던 공허함 때문이었는데. 부끄럽게도 나는 그 순간 반하고 말았다. 참으로 쉬운 남자였다. 타인의 온기에 굶주렸던 내게, 음료수 한 캔은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온기였다. 어떤 음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심장을 간질이던 그 감촉만은 선명하다.


학년 회의 시간마다 내 눈은 그녀를 좇았고, 회식 자리에서는 술기운을 빌려 "결혼 준비는 다 되어있다"는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과거의 내 입을 틀어막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의 편린들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기록하는 것은, 이 글에라도 묻지 않으면 나의 짝사랑이 갈 곳을 잃고 영원히 부유할 것만 같아서다.


물론, 고백은 하지 못했다. 또다시 거절당할 용기가 없는 겁쟁이였으니까. 친한 동료를 통해 알아본 가능성은 "어렵다"는 완곡한 사형선고였다. 그리고 그 착한 동료가 지금의 아내를 소개해 주었다. 친구의 아내의 친구.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 사서 선생님도, 동료 선생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도, 얼굴도 시간의 풍화 속에 마모되었다. 그저 달콤 쌉싸름했던 감정의 잔향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큰 후회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거절당하더라도, 마음 한번 꺼내 보일 것을. 그녀에게는 못 할 짓이었겠지만, 나는 조금 더 빨리 자유로워지지 않았을까.


그때의 후회가 오늘, 이렇게 글감이 되었으니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글로 남기지 않으면 나의 1년, 두 번의 짝사랑은 없던 일이 되어버리니까.


짝사랑은 지극히 이기적인 사랑이다. 내가 보고 싶은 모습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상상하며, 상대에게 비친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행위. 태양이 아닌,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달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장 순수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짝사랑이란, 온전한 사랑을 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서툰 연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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