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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갇힌 청춘

책을 기록함

by 기차는 달려가고

<레몬>, 가지이 모토지로 지음, 이강민 옮김, 소화,



어느 시대, 어떤 사회도 완벽하지는 않다.

모순이 있고 부조리와 불합리가 있다.

하지만 사악한 무리가 더 기승부리고 날뛰면서 올바름을 박해하는 시대가 있고.

대다수 사람들이 바른 가치관으로 되도록 정당한 공동체를 이루려 노력하는 사회가 있다.


1901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1932년 사망한 작가 가지이 모토지로는 관서지방과 도쿄를 오가면서 성장했는데,

9년 뒤 서울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작가 이상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작풍은 다른데 아마 뛰어난 재능을 미처 펼쳐보지 못하고 불우하게 살다가 폐결핵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는 점에서.

또 둘 다 자학이라 보일 만큼 심하게 방황하며 힘겨운 청춘을 살아서인가 보다.



오랜만에 작가의 단편집 <레몬>을 꺼내 들었다.

작가는 생전에 몇 편의 작품을 발표했고 습작이라 할 원고 몇 편을 남겼다.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폐결핵으로 요양생활에 들어가 투병 중에 간간이 작품을 썼으니.

사회에 뛰어들고 싶어 했으나 병으로 격리되어 부조리한 사회를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단편집에 실린 작품 중 "레몬"은 아주 감각적인,

한 편의 시와 같은 짧은 글이고.

"성이 있는 마을에서"는 시골마을에서 보낸 조용한 일상을 담백하게 풀어놓은 한 폭의 그림 같은 글이다.

모두 1925년에 발표했다.


'아,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다. -이것은 요즈음 불면의 밤이 정해놓은 코스였다.

이상한 기분은 전등을 끄고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눈앞에 무언가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듯한 낌새를 느끼게 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는데 바라보는 동안 티끌만 한 크기로 변한다. 확실히 어디선가 만져도 보고 입에 머금어 본 적이 있는 듯한 운동이었다. 회전기와 같이 끊임없이 돌고 있는데, 자고 있는 자신의 발 끝 부분에 있을 것으로 상상하고 있으면 그 즉시 터무니없이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버린다. ("성이 있는 마을에서" 61,62쪽)


여동생의 죽음으로 깊이 상심한 동생을 위로하려 시골에 사는 누나는 동생을 초대한다.

할머니와 부부와 손녀가 있고.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와있는,

온순한 사돈처녀가 있는 단란한 가정.

그 수십 년 전 시대가 바뀌기까지 성이 있던 마을에서, 작가는 번민을 떨치지 못하여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도 마을의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잔잔한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밤에는, 그날 밤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열두 시쯤에 소낙비가 왔다. 그는 또 한 차례 소나기가 와주길 기다리면서 누워 있었다.

조금 있다가 멀리서 또 소나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레소리가 빗소리로 바뀌었다. 한 차례 뿌리고 난 소나기는 또 시내 쪽으로 옮겨갔다.

모기장을 들치고 나와 비막이 문을 한 장 열어젖혔다.

성의 본채에 전등이 켜져 있었다. 비에 젖은 나뭇잎이 그 전등 아래에서 무수한 물고기의 비늘처럼 빛나고 있었다.

또 소나기가 내렸다. 그는 마루에 걸터앉아 비에 발을 적셨다.

...

빗발이 거세어지자 물받이는 콸콸 목청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흰 고양이 한 마리가 옆집 처마 밑을 건너가고 있었다.

노부코의 옷이 빨랫줄에 널린 채 비를 맞고 있었다.

...

울기 시작한 귀뚜라미 소리에 섞여 옥구슬을 딱딱한 금속으로 튕기는 듯한 벌레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이마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성을 넘어 또 한 번 소나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66, 67쪽)



내면의 동요와 외부의 풍경을 올올이,

그 이면의 진실까지 아주 섬세하게 느끼고 생각하는 재능을 지닌 작가여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솜털 같은 미세한 것에까지 감각과 두뇌가 일일이 반응하는 예리한 사람은 에너지 소모가 보통의 사람보다 몇 배나 크니.

체력도, 마음도, 머리도 쉽게 지치고 소모된다.

이상이나 가지이 모토지로나,

자신의 재능 때문에 온당치 않은 세상을 더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세상에서 자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깊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1년 전,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도 온당한 과정 없이 그저 삭제되어야 하는 분들의 영혼을 위로합니다.

유가족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면서,

잘못이 바로 잡힐 그날을 기다립니다.

드릴 것은 하얀 국화 한 송이와 나의 애처로운 마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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