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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Aug 15. 2024

여름 밥상

은이의 충실한 밥

친구가 다녀간 뒤로 은이는 몹시 아팠다.

찜통 같은 부엌에서 고기를 굽느라 몸에 무리가 때문이겠지만.

몇 겹의 어려움에 빠진 친구의 처지 속상해서 

쏟아지는 비에 은이 기분도 축 처져버렀다.


며칠이 지나서 비가 그쳤다.

그리고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됐다.

골목을 내다보면 활활 타는 태양열이 지표에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느낌이었다.

연일 폭염경보가 발령되고 휴대폰에서는 안전문자가 울렸다.

무서운 열기였다.

더위에 취약한 은이는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몸에 닿는 뜨거운 햇볕은 마치 팽팽하게 날아온 화살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더위가 극성을 부리면서 초목은 무서울 정도로 무성해졌다.

절정기.

넓게 퍼진 나 이파리서로 겹쳐서 해를 가리고.

검은 빛깔이 감도는 초록 이파리들은 윤기가 번질거렸다.

은이는 더위 때문에 집을 나서지 못했지만,

지나치게 왕성해진 초목의 기세에 초목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다.

울퉁불퉁 근육을 키운 청년을 보면서,

아, 동글동글하던 아가 때가 예뻤어, 하는 심정이랄지.



종일 창문을 닫고,

햇빛을 가리느라 블라인드까지 내리고 에어컨을 켜고 있다 보면

몸으로 스며드는 에어컨의 냉기에 발이 시려진다.

무엇보다 답답하지.

그래서 해무렵이면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여는데

 강렬한 햇빛에 달궈진 집에서는 억눌렸던 열기가 되살아나고 창문으로는 훅, 열파가 밀려든다.

더위가 지속되면서 생활은 갈수록 늘어져서,

한낮에는 축 쳐져있다가 밤늦게서야 집안일을 하고 새벽에나 잠이 들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몸을 씻고 자리에 누울 때 느끼던,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보냈다, 하는 자부심은 사라지고.

더위로 헝클어진 일상에 자율성을 상실한 듯 속상한 마음으로,

잠이 부족하고 몸이 불편해서 책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

아주 괴로운, 무위의 이었다.


날씨 때문에 입맛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끼니는 놓치지 않았다.

눈 뜨고 있는 시간 대부분 '이따가 뭐 먹지?'를 궁리한달까.

전기밥솥을 쓰지 않는 은이는 이 더운 날, 밥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치솟은 온도는 시간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으니.

냉장고 안에 넣어둔 밥과 냉동실에 넣어둔 카레와 주먹밥을 다 먹고 나서도 며칠 동안 밥을 지 않았다.



단호박을 손질한다.

먹기 좋게 잘라서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끝!

감자는 껍질을 벗겨 큼직하게 잘라둔다.

역시 전자레인지로 해결.

하고 담백감자 맛은 참 사랑스럽지.

굵은소금 몇 알 뿌리거나,

버터나 치즈, 소시지 같은 음식과 잘 어울린다.

계란은 삶는다.

끓는 물에 1분, 불을 끄고 5~ 7분 정도 그대로 두면

노른자가 부드럽익는.

날이 더워지면서 과일이 많이 먹힌다.

초여름부터 줄곧 먹어온 참외는 이제 그냥 지나치

른 햇사과, 노르스름하면서 붉은 자두를 자주 사게 되었다.

오며 가며 과일을 집어먹는다.


국수도 여러 번 먹었다.

미리 계란 지단을 만들어 두고 파를 잘게 썰어놓으먹을 때  국수만 으면 된다.

평소 국물 있는 국수는 그리 즐기지 않고,

몸 상태 때문인지 매운맛도 내키지 않아서

통밀가루나 메밀가루로 만든 심심한 비빔국수를 해 먹었다.

삶아서 찬물에 충분히 헹군 국수는 물기를 쪽 털어내고.

간장과 들기름 (때로는 참기름), 깨소금, 잘게 썬 파와 김가루를 넣어 비빈  계란 지단을 얹으면,

담백하고 고소해서  괜찮다.

질리지 않는  맛.


좁은 부엌에서  켜고 요리하기가 겁나서 은이는

김치 또는 절인 올리브에 소고기 육포를 뜯어서 반찬처럼 먹기도 했는데.

그러다 밥과 반찬으로 이루어진 밥상이 그리워서 전자레인지에 한 공기쯤 밥, 이라기보다는 쌀을 익혀 먹다가.

안 되겠어, 하면서 작은 냄비에 밥을

불을 쓰지 않는 반찬을 몇 가지 만들었다.

황태채를 가늘게 찢어서 간장, 설탕, 고춧가루, 기름과 다진 대파에 양념이 잘 배도록 싹싹 비벼낸다.

참치 통조림을 양파, 절인 오이 같은 재료에 마요네즈 소스버무려서,

뜨거운 밥에 얹어 김에 싸 먹으면 맛있다.

김밥, 주먹밥에 기도 하지.

냉동된 자숙 꼬막살이나 바지락살에 끓는 물을 한번 흘러준 뒤에,

파, 양파, 고추, 마늘. 참기름, 간장, 고춧가루 등으로 양념해서 고소하거나 또는 매콤하게 무쳐먹기도 했다.


렇게 며칠을 보낸 은이는 냉동식품과 레트로트 식품을 주문했.

우선 국물 음식- 맵지 않은 맑은 감자탕, 시래기 갈비탕이 좋았다.

건더기와 국물을 훌훌 떠먹고 밥은 나중에 조금 국물에 말아먹는다.

쓰고 남은 기름 처리가 곤란해 집에서 튀김 요리는 하지 않는 은이라서 평소에도 탕수육은 냉동 제품을 사 먹는다.

사시사철 만만한 탕수육은 더운 날에도 괜찮은 메뉴.

튀긴 고기를 냉동 상태로 오븐에 넣어 굽는 동안,

소스는 프라이팬에 데워서 튀긴 고기를 넣고 볶아준다.

다른 때는 소스에 채소를 더 넣고 간도 다시 맞춰 먹지만

더운 날씨는 무조건 간단하게, 손쉽게 하라 네.

떡갈비먹었다.

오븐에 익힌 떡갈비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김에 싸 먹기도 .

(김치 필수)

깍둑 깍둑 썰어양념장을 뿌려가며 채소랑 같이 볶아서도 먹는다.

여행 때 들고 다니던 블록 형태의 인스턴트 국물도 먹었다.

된장국, 북엇국.

뜨거운 물을 부으면 그럭저럭 국물 맛이 나니까.

너무 더워서 반찬 만들기 힘든 날에 괜찮았다.

냉동 김밥과 도시락도 몇 가지 주문해 봤다.

가격대가 있는 제품이었는데도 입에 썩 맞지는 않았다.

내손으로 밥 해 먹어야 하는 고단한 미각임을 확인한 셈이었다.



그러면서 떠올렸다.

엄동설한이나 무더위나 한결같이,

한 끼도 소홀하지 않은, 정성 가득한 밥상을 차려주셨던 할머니는 초인이란 말인가.

찌는 듯 더운 여름날에도 밥상 위에는 언제나 뜨거운 밥과 매끼 바뀌는 국물 음식,

바다와 땅에서 나는 온갖 음식들이 골고루 올라와 있었지.


보글보글 참치쌈장을 끓여서 갖가지 푸른 이파리들로 쌈을 싸 먹거나.

닭개장도 여름에 자주 먹었다.

이상하게도 여름에는 소고기 양지머리로 끓인 육개장보다 닭고기와 대파를 듬뿍 넣어 맵게 끓인 닭개장이 더 끌린다.

토종닭 한 마리 푹 삶아서 살을 뜯어먹는 닭백숙도 종종 먹었지.

삼계탕은 할아버지 따라간 식당에서 먹는 음식이었고 닭백숙은 집에서 해 먹는 음식이었다.

통통한 닭다리 하나 손에 들고 섞어놓은 깨소금, 후춧가루, 소금을 찍어먹으면, 최고!

닭죽도 종종 먹었다.

닭을 푹 고아서 일일이 살을 발라내 잘게 어서,

다진 채소와 불린 쌀을 넣고 계속 저어서 끓이는 그 손 많이 가는 닭죽을 한여름에 끓이셨네.

녹두죽도 여름에 먹는 음식이었다.

녹두가 찬 기운이 있다 해서

더위로 열이 오르면 녹두죽이 상에 올랐다.

콩나물죽도 여름에 즐겨 먹었던 기억이다.

콩나물밥은 김치밥과 함께 겨울에 자주 먹었는데,

콩나물 죽은 여름에 종종 먹었다.

깔끔하면서 순한 맛이 좋다.

끓이는 내내 저어야 해서 불 앞을 떠날 수 없는 각종 죽들을,

입맛 떨어지지 말라고 그렇게나 열심히 해주셨구나.


아욱은 여름이 제철이다

멸치 육수에 된장을 풀어 아욱을 넣은 아욱국은 언제나 환영받는 여름 음식.

마찬가지로 된장을 풀어서 끓이는 구수한 아욱죽도 정말 맛있지.

손이 많이 가는데 말입니다.

찔한 고등어자반도 떠오른다.

고등어자반은 구워서도 먹지만 맑게 지져서도 먹는다.

여름날 저녁, 누룽지가 잔뜩 뜰어간 따끈한 숭늉에 고등어자반을 먹으면 입맛이 돌았다.

어린 은이는 또 여름날에 먹는 바싹 구운 꽁치구이를 좋아했다.

단단하게 구워진 꽁치를 할머니가 가운데 뼈를 싹 발라 살점만 똑 떼어 은이 앞에 놓아주시면,

찬물에 만 밥과 얼마나 잘 어울리게요.

더운 날에는 도토리묵이 시원하고 맛있다.

청포묵이 명절이 있는 겨울 느낌음식이라면,

잎채소, 오이, 당근이 넉넉하게 들어간 도토리묵무침 더운 한여름날에 잘 어울린다.

도토리가루를 사다가 손수 만들어 주시던 그 쫀득하고 고소한 도토리묵.

어디서도 사 먹을 수 없지.

그립구나.

가지도 즐겨 먹었다.

가지를 쪄서 참기름 듬뿍 넣어 고소하게 무치는 부드러운 가지 무침도 맛있고.

옆으로 토막 낸 가지를 가른 뒤에 다진 소고기와 온갖 양념으로 만든 소를 꽉 채워서 쪄내매콤한 가지찜은 또 얼마나 맛있게요?

가지찜과 같은 양념으로,

아래에 가지찜을 깔고 살이 오른 기름진 고등어 토막을 올려서 진한 맛의 고등어찜을 만들기도 했다.

정녕 밥도독이었지.

더해서 가지밥, 가지구이...

다시 해 먹는 날이 올까?


그저 맛있게 먹기만 했던 은이.

잘 먹는 은이를 무조건 예쁘다, 예쁘다 하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라서 고마운 줄도 몰랐어요.

밥상을 차리느라 쏟은 노고와 사랑의 마음은 더 몰랐어요.



이 더운 날, 정성 가득한 밥상을 차리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식당이나 음식 제조업체에서 밥 짓분들께도 감사 또 감사.

지옥불 같은 화염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를 책임지시는 분들은,

많은 이들의 생명을 지키는 막중한 직분을 수행하시니,

모두모두 복 많이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

세상은 사람들의 정직한 노고와 타인을 보살피는 사랑의 힘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야 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하려고 무지 애쓰면서 살아가거든.

대부분. 대부분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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