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달은 주룩주룩 비가 퍼붓겠지.
습기는 폭발하겠고.
비 그치고 나면 찜통 같은 불볕더위가 쏟아질 것이다.
더해서 태풍.
몇 달 그렇게 험한 날씨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새 추석이고.
추석 지나면 한 해가 다 간 듯, 쓸쓸한 기분이 들것이라.
몇 달을 고심해 온 안락의자를 샀다.
질이 조금 좋아지면 가격은 몇 배 뛰고,
디자인이 괜찮아서 앉아보면 어딘가 불편했다.
여러 곳을 둘러보다가 비교적 앉아서 편하고,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으면서
가격이 적당한,
무난한 디자인을 골랐다.
의자 들이는 김에 방의 가구 배치도 싹 바꿨다.
벽에 걸린 에어컨으로는 모자랄 듯해 제습기와 선풍기를 새로 산 데다,
그동안 베란다 빨랫줄에서 말리던 빨래를 습기가 치솟을 장마 기간에는 실내로 들여와야 하거든.
무엇보다 날이 더워지면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볕이 따가워서 창가에 놓인 침대를 그늘로 옮겨야 했다.
한강에서 도시락 먹으면서 급조된 걷기 모임은 남산둘레길을 걸었다.
길이 편하고 굵은 나무들이 넓게 그늘을 드리운,
아름다운 초여름 풍경이 더없이 좋았는데.
특정한 지점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음이 아니라면
포르르 날아가는 새들이며,
졸졸 흐르는 도랑에,
풍성하게 이파리를 펼친 나무 터널들이,
마치 깊은 산에 들어온 느낌을 주었다.
따로 또 같이,
드문드문 벤치에 앉아 쉬면서 감탄을 나누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분위기에 누가 될 새라
친구들은 주로 앞뒤로 떨어져서
혼자, 자신의 보폭으로 길을 걸었다.
아름다운 길에 더해서 걷기 전에는 만두집에서 맛있는 만두를 먹었고,
한참을 걷고 나서는 족발집을 찾아가 족발 한 세트를 말끔히 비웠으니.
머, 좋지 않을 수가 없지.
식당을 나와서는 배에 가득 찬 음식을 소화시켜야 한다고 차디찬 팥빙수까지 찾아 먹으면서!
누군가 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한없이 걷고 싶다고 말했고.
이어지는 나도, 나도!
자리는 급,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는데.
하지만 곧 중부지방까지 장마가 올라온다 하고,
비 그치면 무더위에 휴가철이라 어딜 가나 사람들이 북적일 텐데?
걱정이 뒤따랐으나.
그러니까 그전에 가야지.
다음 주?
와우, 이런 결단력이라니.
간 김에 아침해 뜨는 것도 보자, 는 기가 막힌 제안이 보태져서.
우우- 넷은 비명 같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여행 계획을 격하게 환영했다.
직장 다니고 아르바이트하는 구성원들이 평일에 시간 맞추기는 정말 어렵지만.
갑자기 기차표를 구하고.
(자리는 떨어져 앉았지만요)
넷이 같이 잘 수 있는 도미토리를 찾는 일도 쉽지 않았는데.
게다가 해돋이를 볼 수 있는 맑은 날씨까지.
이 모든 걸 다 해냈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다음 달 카드값은요?
아아, 그건 다음 달에 걱정하고요, 지금은 즐거워만 합시다.
(허리띠 졸라맬 겁니다.)
출발 전, 은이는 장마 대비로 바빴다.
할머니께서는 연례행사처럼 장마 전이면,
작년 여름을 보내고서 싹 빨아 넣은 여름 침구를 모두 꺼내 다시 세탁하시고,
집 안팎을 대청소하셨지.
은이도 습기 때문에 곰팡이 피기 쉬운 장마철을 되도록 말끔하게 보내려고,
온 집안을 쓸고 닦고는 기본이고,
배수구마다 과탄산소다 녹인 물을 부어 싹싹 청소하고,
가구와 벽의 먼지를 털고 침대 매트리스를 뒤집었으며.
서랍 뒤, 침대 아래. 모든 선반들.
현관 바닥, 베란다 바닥, 목욕탕,
세탁기도 안팎으로.
냉장고는 내용물을 다 꺼내놓고 알코올로 닦았다.
걸레는 몽땅 빨아 널고.
장마 때는 빨래거리가 늘어나지만 건조는 쉽지 않을 거라 얇은 소창수건을 10장 샀다.
더 살까, 하다가
"쓰레기와 빨래는 묵혀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 특히 여름에는." 하셨던 할머니 말씀이 떠올라,
지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습도가 높은 여름 동안은 세탁기를 자주 돌리기로 한다.
그렇게 대청소를 마치고 나서는 낑낑, 가구 위치를 싹 바꿨다.
무거운 책상은 다리를 약간씩 들어 올려 각각 걸레를 받치고 슬슬, 사실은 온 힘을 다해 조금씩 움직여 자리를 잡았고.
침대도, 서랍장도, 옷장도 자리를 바꾸었다.
다해놓으니, 아, 개운해라.
방을 둘러보니 가구 배치를 바꾼 이 편이 훨씬 안정적으로 보인다.
흠, 날이 추워지면 맘이 바뀔지 모르겠습니다만.
무더위를 대비하는 음식 준비도 빠질 수 없지.
햇양파를 한 주머니 샀다.
양파를 잔뜩 채 썰어서 갈색이 나도록 달달 볶았네.
샌드위치에도 넣고 삶은 감자랑도 먹어야지.
설탕과 양파 채를 1:1로 하는 양파청을 만들었다.
흐뭇.
조림 요리할 때 설탕 대신 넣으면 맛나거든요.
양파를 잔뜩 넣고 카레도 한 냄비 끓였다.
1회분씩 덜어서 거의 다 냉동실에 보관.
밥을 많이 해서 납작하게 주먹밥을 만들었다.
요것도 냉동실로 직행.
무더워서 불 쓰기 싫은 날, 냉동실 구석에서 발굴되는 카레나 주먹밥 한 개는 얼마나 기쁠까?
날이 더우면 분명히 밖에 나가기도 싫을 거라 비상식량을 준비한다.
아무리 인덕션이라 해도 보리차를 끓이면 부엌에 온도와 습도가 치솟으니,
여름 동안 펄펄 끓인 보리차는 멀리하는 대신 생수를 넉넉히 주문한다.
또 지난 한파 때처럼 참치 통조림, 꽁치 통조림, 스팸과 옥수수 통조림에다가,
빵 대용으로 먹을 만한 바싹 마른 크래커와 냉동 채소를 사두었고.
평소에는 환경을 위해 되도록 쓰지 않던 종이타월과 일회용 청소포도 행주와 걸레 빨래를 줄이기 위해 구입했다.
식품을 보관할 선반과 냉장고가 작아 아쉬웠지만,
어쩌면 둘 곳이 없어서 쇼핑에 제동 걸리는 게 다행인지도 몰라.
혼자 얼마나 먹겠다고 자꾸 사들이냐 말이야.
세상의 종말을 대비한다는 부호들의 재난캡슐도 아닌데 말이죠.
동쪽 바다를 보러 가는 날.
멤버들이 일을 마치는 저녁에 KTX를 타기로 해서
저녁밥은 각자 해결하고 서울역 개찰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늦어서야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할 테니 밤에는 몸을 씻고 곧바로 잠들어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 숙소 부근 바닷가에서 해돋이를 보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공용부엌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씻은 뒤에,
짐을 들고 나와 해안선을 따라서 몇 시간 걸을 예정이다.
걷다가 마땅한 식당이 보이면 밥을 먹고.
걷기를 마치면 곧바로 기차를 타서 오후에는 서울로 귀환하는 일정.
은이와 걷기 멤버들은 걸으면서 먹을 간식과 아침식사를 미리 준비하기로 하고,
각자 준비물을 나누었다.
은이는 간단한 아침식사를 담당하고
친구들은 걷는 틈틈이 먹을 음료와 과일, 군것질거리를 맡았다.
그래서 은이는 그릇을 적게 쓰고 뒤처리가 간편하도록,
사과와 오렌지는 깨끗이 씻어 입에 쏙 넣기 좋게 손질해서 지퍼백에 담고.
계란은 반숙으로, 넉넉하게 삶았으며.
불고기를 잘라 넣은 볶음밥을 동그랗게 뭉쳐 주먹밥을 만들고.
단호박도 먹기 좋게 손질해서 전자레인지 용 스팀백에 넣었다.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스팀백 채로 4분 정도 돌리면 맛있는 단호박 찜이 되겠지.
친구들은 간식으로 고구마 말랭이, 방울토마토, 참외에 아몬드, 식혜와 두유, 엿, 당근 스틱을 가져왔고.
생수를 인원에 맞춰 얼려왔으며
전해질 가루를 가져와 물에 타 마셨다.
걸으면서 달큼한 당근 스틱을 먹고 쫄깃한 고구마 말랭이를 우물거렸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이에 쩍쩍 붙는 달달한 엿을 쭐쭐 빨고.
기차가 서울을 향해 달리는 동안 피로한 일행은 주로 잠에 빠져있었지만,
정신이 들면 식량 주머니를 뒤져서 입안에서 즙이 탁 터지는 방울토마토를 먹고 식혜를 쭈욱 들이켜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해돋이는 황홀했다.
수평선에 깜빡이는 고기잡이 배들의 조명만이 캄캄한 어둠을 표시하다가.
천천히,
깜깜한 밤하늘은 점차적으로 노르스름하게 그리고 불그스름하게 변해갔고.
순식간에 빛의 덩어리, 붉은 해가 둥실 떠오르더니.
마침내 푸른 하늘이 활짝 드러났다.
다들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매일 반복되는 현상이 이다지도 가슴 벅찰 수 있을까?
숙소를 나와 쨍쨍한 햇살 아래 파랗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걷거나
또는 바닷가 솔밭에서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묵묵히 걸었다.
어제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걷다가 길 옆 긴 의자에 앉아 잠시 쉬면서 일행은
해가 뜨고 날이 밝아오는 이른 아침이 참 좋은 시간이라고 입을 모았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 귀한 시간에 하늘 한번 바라보지 못하고는,
그저 자느라 또는 알람 소리에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후다닥, 준비하고 출근길에 시달리지.
아. 이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고 복작거리는 거리에서 사람들 사이를 종종거리며 살아갈 뿐이라고, 탄식했다.
후배가 말한다.
좁은 방과 재미없는 회사를 오가면서 나는 평생 이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암담한 기분을 떨칠 수 없는데요.
지금 이 순간만은 다 잊었어요.
평화로워요.
아, 정말 좋아요.
어쨌든 잘 될 거라는 낙관적인 기분까지 들려고 해요.
매일 이렇게 마음 편히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곁에는 늘 아름다움이 있는데,
단지 바라보고 기뻐하기만을. 조용히 기다려주는 아름다움이 있는데.
눈길만 주면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함박웃음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그저 지루한 나날의 생존 활동에 매달리느라,
걱정 근심에 휩싸여,
슬픔이 마음을 옥죄어,
종종 욕망이라든가 열등감에 치이면서 곁에 있는 아름다움을 돌아보지 못한다.
느끼지 못한다.
스스로 나를 보살펴야 해.
나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좋은 소리를 듣게 해야 해.
내가 나를 위해야 해,라고,
아쉬워하며 바다를 떠나는 넷 뒤에서 철썩이는 파도가 일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