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여니 뜨겁고 축축한 공기가 훅 밀려든다.
잔뜩 찌푸린 채 낮게 가라앉는 하늘은 또 어떻게 바뀌려나.
미친 듯이 폭우가 퍼붓다가 하루 이틀 반짝 해가 나고,
또 게릴라 같은 폭우가 지역을 옮겨 다니며 쏟아지는 종잡을 수 없는 날씨.
거센 비가 그치고 하늘이 밝아지나 싶다가도 곧 저만치서 다가오는 시커먼 구름은 우르릉 쾅쾅,
굉음과 함께 빗물 폭탄을 사정없이 퍼붓는다.
은이는 방금 사 온 소고기와 갈치를 냉장고에 넣고 장바구니를 벽에 걸고는 목욕탕으로 들어간다.
가만히 있어도 더운 날씨에 장을 봐서 가파른 언덕을 올라오느라 땀을 비 오듯이 흘렸던 거다.
샤워를 해서 개운해진 은이는 에어컨이 돌아가는 방의 출입문을 부엌을 향해 열어놓고 선풍기도 켠다.
휴대폰으로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을 틀어놓고 앞치마를 두른 다음,
메모를 보면서 조리 순서를 생각하고 그에 맞춰 조리도구를 늘어놓는다.
먼저 모과차를 우려야지.
얼음 넣어 마실 거니까 아주 진하게.
이어서 자두와 참외를 씻어서 통에 담는다.
고기는 양념 없이 구을 거라 찍어먹을 소금과 참기름 그리고 씨겨자를 준비하고.
칼칼하게 맛을 낼 갈치조림은 재료를 다듬고 양념을 만들어두었다가 밥상을 차려낼 때쯤 끓여야겠다.
고구마줄기부터 볶을까?
고구마줄기를 볶고 나서 멸치 육수에 된장을 풀어 아욱국을 끓이면 얼추 시간이 되겠지.
그렇게 조리 순서를 정하자 양념으로 쓸 파, 마늘, 고추를 잘게 썰고.
갈치조림에 넣을 감자와 양파는 납작하게 썬다.
멸치, 통후추, 대파, 다시마, 양파 같은 재료에 술을 넣어 육수를 끓이고.
어제 사 와서 미리 껍질 벗겨 데쳐놓은 고구마줄기를 볶기 시작한다.
은이는 지금 친구를 위한 저녁 밥상을 준비하고 있다.
해외에서 학교를 마친 친구가 서울에 돌아온 지 두 달 가까이 된 오늘에야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작년 여름 친구가 서울에 왔을 때는 은이가 할머니 병환으로 꼼짝 못 했으니 거의 2년 만에 만나는 거네.
고등학교 동창인 은이와 친구는 책 읽기와 고기를 좋아하는 공통점으로 친해졌다.
둘이서 몇 번인가 교복 차림으로 고깃집까지 진출해서는, 시커먼 아저씨 손님들 사이에서 테이블을 차지하고 천연덕스럽게 고기를 구워 먹었지.
둘 다 고기 먹을 때는 오직 고기만 먹을 뿐, 쌈도 싸 먹지 않는다.
고기로 불러진 배를 뚜드리면서 국과 밥은 입가심으로 조금만 떠먹는 스타일.
친구는 아버지 사업이 기울면서 지난 1년을 참 힘들게 보냈다고 한다.
자격증을 딴다는 목표가 없었다면,
그 자격증이 비교적 고소득의 직장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학교 때려치우고 벌써 서울에 돌아왔을 거야.
힘들게 공부해서 자격증까지 취득해 서울에 돌아왔지만 아직 달라진 건 없다.
아프리카로 갈까, 생각 중이야.
현지 한국 회사에는 자리가 있나 봐.
곧 집도 내줘야 해서 시간이 없거든,
얼른 결정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안 움직이는지.
어려움에 빠진 친구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은이는,
좋아하는 한우라도 실컷 먹으라고 소 등심과 갈빗살을 1kg 샀고.
고기에 곁들여 먹을 백김치도 준비했다.
예전에 은이 집에 놀러 왔던 친구가 생선조림을 맛있게 먹던 기억으로 갈치조림을.
구수한 여름 음식 아욱국,
요맘때나 먹을 수 있는 파릇파릇한 고구마줄기는 들깻가루를 뿌려서 고구마줄기 들깨볶음으로.
그렇게 친구 밥상을 구성했다.
입맛에 맞으면 좋겠는데요.
사실 은이는 친구와 만나는 게 편한 마음은 아니다.
친구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거든.
위로한답시고 섣부르게 말했다가 안 그래도 힘들 친구의 마음을 다칠 수도 있겠고.
그렇다고 아무 일 없는 양 딴소리만 하는 건 성의 없게 느껴지겠지.
무조건 친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게 은이 마음인데
어떤 태도로, 어떤 말을 해야 친구에게 힘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은이는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한다는 방침이라,
신상 문제를 누구와 의논하거나 타인에게 인생의 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대처하는데 익숙해 있어서 누가 물으면 있는 그대로 말은 해주지만.
딱 그뿐.
먼저 나서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다거나 해결방안을 묻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은이 성격이고 친구는 다를 수 있으니까,
적극적으로 친구의 상황을 묻고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 하는 자세가 좋을지- 요건 은이 스타일이 아님.
아무 일 없는 양 무심하게 대하면서 친구가 이야기하면 성의껏 들어줄지- 요것이 은이 스타일.
모쪼록 친구가 서운하지 않도록 마음을 살피려니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다.
지하철역으로 마중 나가려는 은이를,
친구는 비도 오는데 둘 다 고생할 필요는 없다면서 지도 어플이 일러주는 대로 따라가면 집이 나오겠지,라고 완강하게 말렸다.
하필이면 비가 가장 세찰 때 언덕을 올라오느라 비와 땀에 몸이 함빡 젖어버린 친구는,
은이가 건네준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가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낸다.
이럴까 봐 준비해 왔지, 라며.
씻고 나서 밥 먹을래? 했더니,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밥부터 먹어야지, 하며 깔깔 웃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훨씬 홀쭉해진 친구는 밥을 먹는 동안 오직 음식에만 집중한다.
고기를 구우면서 먹으면 불판 때문에 더우니까 은이는 친구를 시원한 방에 앉혀놓고,
열기가 팍팍 오른 부엌에서 연신 고기를 구워서 방으로 나른다.
친구는 아기새처럼 고기도, 갈치조림도, 나물도 꿀떡꿀떡 잘 받아먹으면서 맛있다! 를 연발해 은이를 기쁘게 하는데.
배부르게 밥 먹고 나서 은이가 부엌을 치울 동안 세수하고 나온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함께 좋아하던 가수의 노래를 틀어놓고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면서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한다.
서울에 돌아와 두 달 동안 집에서 제대로 밥을 차려먹은 적이 없단다.
사이가 안 좋다가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서로 위로하고 협력하는 게 가족일 텐데.
아버지는 사업장이 있는 지방에서 혼자 지내신 지 오래고,
남매를 뒷바라지한다는 명목으로 어머니는 자식들과 함께 서울에 계셨다.
심리적으로는 이미 갈라졌지만 경제적인 문제와 체면으로 간신히 묶여있던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아버지 사업의 붕괴와 함께 완전히 무너졌다고 친구는 말한다.
은이는 무던하고 온순한 친구와 너무 달라서 놀랐던 친구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대체로 부유하던 시절에도 남달라 보이던 분이었으니,
경제 위기로 생활의 기반이 무너진 지금,
친구는 어머니가 쏟아내는 신경질과 불안과 원망과 절망을 혼자 고스란히 감당하는 중이었다.
우리 엄마는 힘든 일 100이 입력되면 자가증식 해서 주변사람들을 500 만큼 힘들게 하는 사람이야.
어른이라면 힘들어도 일정 부분 묵묵히 감당하거나,
직접 나서서 해결책을 찾아보거나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게 전혀 없어.
하루종일 억울하다면서 남 탓만 해.
내가 돈을 벌면 엄마한테 돈은 줄 수 있어, 하지만 더 이상 같이는 못 살겠어.
갖고 있는 물건 중 쓸만한 건 다 팔고 있다며
돈을 얼마라도 마련해야 해, 말했다.
그 뒤에도 현재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 얘기, 직장 찾는 과정에서 겪은 얘기도 했는데 다들 기분이 무거워지는 내용이었다.
돈 벌기 정말 힘들어.
돈 앞에서는 다들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몰라.
그동안 내가 누린 생활로는 절대 못 돌아가겠지.
우리 일에는 직업윤리라는 게 있는데,
지키기가 거의 불가능한 환경이래.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의 소모품으로 살아갈 내 모습이 두렵기는 해.
밤이 늦어 자리에서 일어난 친구는
정말 오랜만에 맛있는 밥을 맘 편하게 먹었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친구를 바래다주느라 후덥지근한 언덕을 내려갈 때,
다행히 비가 그치고 밤하늘에는 노란 둥근달이 떠있었다.
은이는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안에서 맴돌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는데.
각종 상점들이 불을 밝힌 큰길에 나와 지하철역에 가까왔을 때쯤,
우리 함께 읽었던 책에서 모든 주인공들은 위기와 고난을 겪지.
고통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한층 성숙한 어른이 되어 진정한 서사의 영웅이 되잖아?
지금 너는 성장하기 위한 고난의 과정을 거치는 중이고,
나는 네가 이 시기를 잘 보내서 진짜 멋진 사람으로 우뚝 설 거라고 굳게 믿어.
운명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모르지만 어디에 떨어지더라도 너는 잘 해낼 거야,
은이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친구는 떠나는 전동차 안에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아직 바깥에서 손을 흔드는 은이와 달리 돈을 벌어야 하는 친구는 이미 어떤 형태로든 사회라는 전동차에 올라탔다.
이윤으로 돌아가는 조직의 부속품으로,
생계라는 목줄에 끌려다니며,
역할에 맞도록 자신을 변형시켜야 할지도 모르지.
모쪼록 '나'라는 존재를 잘 지켜내기를 은이는 친구를 위해 기도한다.
아무리 현실이 고통스러워도
아침에는 해가 뜨고 계절은 순환하니.
기쁨은 기쁨대로 느끼고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순수한 마음은 꼭 지켜내기를, 친구에게 바라지만.
그래도,
제발 친구에게 너무 힘든 짐을 지우지는 말아 주세요.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요, 하고 은이는 무작정 기도한다
즐겁게 뛰놀던 놀이터에서 밀려난 기분이다.
그렇구나.
이제 우리는 어른이니까,
어른은 어른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겠지.
그렇게 우리는 서툴게 어른이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