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시작됐다.
아침저녁으로는 괜찮지만 낮에는 기온이 치솟아서 한여름의 찌는 무더위를 떠올리게 한다.
누그러지지 않는 더위는 입맛을 떨어뜨리고 산뜻한 맛, 시원한 맛만 찾게 하니.
오늘 저녁에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야겠다.
올봄에는 제철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이른 봄날의 쑥버무리와 달래장, 냉이된장국도 입맛만 다셨을 뿐, 그냥 지나갔고.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두릅도,
마른 새우와 볶은 마늘종도,
맛이 잘 밴 마늘장아찌도 시기를 놓쳤다.
바지락도, 주꾸미도.
흑흑, 잊어서가 아니었어.
포장 단위가 은이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아 번번이 진열대 앞에서 망설이다 시기를 놓친 것이다.
그나마 부추는, 봄이 되어 처음 올라온 야리야리한 부추를 한 단 사서,
빡빡한 부추전을 부쳐먹고,
살짝 쪄서 훈제오리랑 같이 양념장에 찍어먹고.
냉동 자숙꼬막을 얹어 비빔밥도 해 먹었다.
남은 건 된장국에 넣었지.
"밥상에 리듬감이 있어야 해.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 맨날 똑같은 반찬이면, 하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지루해",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지.
제철에 나는 음식이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단다.
건강한 땅에서 햇빛 받아 자란 제철음식은 보약이래, 하셨는데.
오늘 저녁 밥상에는 뭐가 오를까.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집을 나선다.
오늘은 좀 멀리까지 갈 생각이다.
언덕을 내려가 큰길 건너 주택가를 지나면 한강에 이르는 지천이 나온다.
물을 끼고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서 길가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는데.
두 달쯤 전인가.
어린 이파리들이 막 크기와 빛깔을 펼쳐나갈 때,
꽃들이 피고 지고 화사할 때,
그 개천길을 걸어서 한강까지 닿았었다.
그동안 풀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스케치하고, 사진 찍고, 풍경과 생태를 세밀하게 기록해야지.
돌아오는 길에는 생협에 들러서 뭐가 새로 나왔는지 보고 반찬거리랑 과일을 사 올 생각이라,
장바구니에 보냉백과 보냉팩까지 배낭에 챙겨 넣는다.
은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되도록 선하고 정의롭기를 바란다.
그리고 은이의 생활이 그 선함과 정의로움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거나,
최소한 폐는 끼치지 않기 바란다.
하지만 원치 않아도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악이 흩뿌려져 있고,
그 악들은 탐욕으로 서로 뭉쳐 거대한 위력을 행사한다.
악은 이익 앞에서 절대 머뭇거리지 않지.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수시로 알쏭달쏭한 가면을 바꿔 쓴다.
반면에 선하고 정의롭고자 하는 노력과 의지도 모래밭의 사금파리처럼 반짝반짝 예쁜 빛을 발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은 미약하다.
혼자, 조용히, 뒤에서... 가만히 있네.
많이 수줍어하거든.
은이는 이 세상에 흩어진 자잘한 선의가 함께 모여 큰 힘을 발휘하도록 앞장설 용기는 없지만,
누구의 선함이라도 응원은 하고 싶다.
그래서 소비할 때 은이는 제품의 가격이나 기능, 품질, 모양도 고려하지만.
가능한 한 바른 가치관으로 운영되는 업체,
제품을 올바르게 만들려는 성실한 업체,
최소한 직원들에게 기혹하지는 않은 업체를 선택하고.
부패하고 사악한 세력과 결탁하는 업체는 피하려 한다.
차선이라도, 가급적이면, 은이가 아는 선에서는 말이다.
선거날 정치인에게 행사하는 나의 한 표나,
매일매일 지갑에서 꺼내는 나의 지폐나,
세상에 대고 내 의견을 피력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
은이는 이 세상에서 착함이 보다 힘을 얻도록 일상에서 연대하고 싶다.
그래서 얼마 안 되는 생활비지만 할머니께서 오랫동안 참여하셨던 생협을 종종 이용한다.
(네, 생협이 무조건 정답은 아니에요.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는 부분도 있지요.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니까요.)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겪는 농부들의 상처 입은 농산물을 사주자는 공지가 올라올 때,
그 농산물들이 순식간에 팔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은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비자들과 유대감을 느낀다.
그런 마음이 좋다.
타산과 이기심의 산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선의와 연민의 조각들.
생산자 직거래도 종종 이용한다.
지난겨울에는 당근과 고구마를 생산자에게서 한 박스씩 사서 두고두고 먹었다.
보리차와 옥수수차는 지방의 어느 방앗간에서 볶은 제품을 배달받고.
작은 기름 전문점까지 일부러 가서 직접 짜는 참기름과 들기름을 사 먹는다.
공정무역업체에서는 예쁜 소품을 사고
환경 문제까지 고려한 제품을 선호하지.
때때로 비영리단체에서 주관하는 농산물 직거래장터에 놀이 삼아 참가하기도 해.
은이는 이런 정보들을 모으고,
멀더라도 직접 찾아가 물건을 사고,
같은 마음으로 참가한 사람들과 무언의 연대감을 이루는 훈훈한 분위기가 좋다.
재래시장에서 물건을 고르면서 가게주인과 나누는 몇 마디 짧은 이야기가 재미있고.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 기업의 홈페이지 쇼핑몰에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필요한 생활용품을 구입한다.
축제 같이 흥겨운 직거래장터는 신나고.
넓지 않은 면적에 소박하게 진열된 생협 매장은 정다우며.
플라스틱 포장 대신 수확한 모습 그대로 쌓여있는 울퉁불퉁 농산물은 참으로 기뻐서,
하나하나 살피다가 그중 어느 것,
나랑 우리 집에 갈래?-초대하는 그 순간이 좋다.
또 익숙하지 않은 식재료를 집으며,
이걸로 뭘, 어떻게 해 먹지?, 궁리하는 시간도 은이는 애정한다네.
백화점도, 아웃렛도. 대형 마트도, 대형 물류업체도 물론 이용한다
하지만 은이에게는 몇 가지 기피 사항이 있으니.
브랜드 로고가 대문짝만 하게 박힌 물건은 껄끄럽다.
브랜드 파워에 속지 말 것- 이상하게 은이는 시장지배율이 압도적인 회사는 내키지 않는다.
여타의 소규모 기업에도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라.
또 최정상급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에게 천문학적인 숫자의 모델료를 지불하는 회사도 싫다.
물건 잘 만들어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파는 게 중요하지!
앰배서더니, 뮤즈니 해가면서 셀럽들과 결탁하는 상업성도 거부한다.
과시적이고 요란한 광고로 소비자본주의에 주눅 든 사람들 심리를 콕콕 찔러대며 물질욕을 부추기는 마케팅은 정말 싫다.
허세나 겉멋이 느껴지면 사람도. 기업도 내키지 않거든.
실속 있게. 건실하게, 꼭 필요한 물건을 제대로, 건강하게 만드는 견실한 업체에 마음이 간다.
볕이 잘 들어서인지 산책로는 녹음이 짙어있다.
콸콸, 물은 힘차게 흐르고요.
(개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소음이 더 우렁차지만요.)
쨍쨍한 햇빛을 맘껏 받고,
시원한 개울물을 흠뻑 빨아올린 이파리들은,
거칠 것 없이 짙은 초록색으로 몸집을 키워나간다.
축대에 기대어 연하고 진한 갖가지 붉은 빛깔의 장미꽃들이 활짝 활짝 피어있네.
길 가던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장미꽃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다들 꽃처럼 예뻐 보인다.
깜짝 놀란 건 개천 한가운데를 차지한 무성한 수초 더미다.
물길 중간중간 사람 키를 훨씬 넘기는 풀무더기가 무성한데,
가늘고 긴 저 풀이 혹시 갈대?
갈대나 억새라면 가을날 수많은 작은 꽃들이 핀,
바람결에 흔들리는 메마른 빗자루 모양으로나 구분하지.
여름날의 파란 줄기로는 뭐가 뭔지 구별 못하는 식물 문맹 은이는,
길고 긴 풀 무더기가 빽빽하게 자라는 흙더미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차지해서,
그 사이를 물길이 마치 도랑처럼 좁게 흘러가는 풍경이 놀랍다.
지난번 방문 기억을 되살려 봐도 물길을 점령한 섬 같은 이 풍경은 떠오르지 않는데.
아마도 물살에 떠밀려온 흙이 고이면서 작은 흙더미가 쌓이고.
그 위에 씨가 날아오니 풀이 자라기 시작했겠지.
전에 왔을 때는 풀들이 미처 길이를 키우기 전이라서 흙더미가 물길 아래 숨어있었을지도 몰라.
그새 무한한 햇빛과 물의 세례를 받은 풀은 막무가내 자리를 넓히고 무럭무럭 세력을 키워서 개천을 차지해 버린 거다.
신기해라.
예전에 본 늦가을 나주 가던 길,
바다 가까이 영산강 하류 풍경이 떠올랐다.
보랏빛 갈대 무더기들이 점점이 놓인 다도해처럼 강을 채우고 있었어.
은이에게는 참 낯선 풍경이었지.
생협 매장에는 하지감자가 나왔다.
아직 껍질이 얇은 아기 같은 감자.
그 포실포실한 맛을 떠올리며 감자 몇 개 집고요.
미니밤호박도 보인다.
은이의 애정템.
얼른 세 개들이 한 주머니를 장바구니에 담으려니,
이제 막 수확해서 단맛이 덜 올랐으니까 집에 가서 숙성시키라 하신다.
넵!
둥글둥글 토실한 파란 매실도 있네.
튼실하기도 해라.
하, 그런데 큰 상자 단위로만 판다.
할머니와 마주 앉아서 매실을 쪼개고 설탕을 붓고 하면서 각각 항아리에 매실액과 매실장아찌를 담아서 1년 내내 먹었는데.
할머니 아프실 때,
혼자 만드느라 낑낑대는 은이에게 '할머니가 못 도와줘서 미안해', 하셨지.
아직 뜯지 않은 매실액 한 병이 김치냉장고에 있는데 고모가 버리지는 않았을지, 잠깐 쓸쓸한 기분이 된다.
지난 일은 잊고요,
미련도 버리고요.
혼자 먹겠다고 손이 많이 가는 매실액을 만드는 건 내키지 않는다.
둘 데도 없고.
대신 진열대에서 이미 만들어진 매실액을 한 병 집는다.
얼음 넣어서 시원하게 타 마셔야지.
배 아플 때는 따끈한 물에 진하게 타마시고요.
오, 생물 한치가 있다.
어우. 예뻐라.
야들야들 작은 아이.
활동가 분께 한치로 뭘 해 먹으면 좋을까요. 여쭙자
그냥 찌기만 해도 맛있고 구워도 맛있잖아요.
고기랑 볶아도 좋고, 미나리랑 새콤 매콤한 양념에 버무려도 맛있고~ 하신다.
오, 새콤 달콤 매콤하게요?
그래. 오늘 저녁은 한치 초무침이닷!
무침에 넣을 오이랑 양파, 깻잎을 사고.
(미나리는 양도 많고 손질이 번거로워서요^^)
집에 과일이 떨어져 가니 참외와 천도복숭아도 한 봉지씩 집어넣는다.
끙, 무거워 잉.
이달에는 생활비 지출이 많았다.
다음 생활비를 시작하려면 아직 일주일가량 기다려야 하는데,
지금 생활비 통장이랑 페이들을 다 털면 만 원이나 남았으려나.
이전의 은이라면 다 쓸 만한 데 썼으니까, 하며 예정된 금액을 넘겨도 소비를 멈추지 않았겠지만.
가치 소비에 더해 정액 지출까지 실천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으니.
이달에 예정된 금액 이상은 지출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냉장고 안에는 먹을 것이 가득하고,
공과금은 모두 지불했으며.
혹시 쓸지도 모르는 얼마의 교통비 말고는 일주일 내에 불가피한 지출 항목은 없을 예정이라,
내 마음만 단속하면 돼.
장 봐온 것을 정리해서 냉장고에 넣을 것은 넣고,
햇감자와 단호박은 베란다로 보낸다.
채소들은 손질하고 한치는 데쳤다.
세일이 끝나면 또 다른 세일이 시작되고.
물건이 팔리기도 전에 새로운 물건이 쏟아진다.
소비자가 조급할 이유는 전혀 없지.
당장 쓸 물건이 아니면 싸다고 미리미리 사두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양념이 맛있게 만들어졌다.
데친 한치를 썰어서, 역시 먹기 좋게 손질한 채소와 함께 양념에 버무려서 흰 접시에 얹는다.
삶은 국수는 동그랗게 말아서 빨간 한치 무침 옆에 놓고.
무침에 넣고 남은 초록의 깻잎은 하얀 국수 아래 깔았다.
희고 빨간 초록색,
6월의 저녁 밥상.
오늘도 잘 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