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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Jul 11. 2024

외할머니와 봄날을

은이의 충실한 밥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은이는 몸이 푹 파묻히고  머리까지 기대는 안락의자가 간절해졌다.

책상 앞에 등받이의자가 있지만 그건 반듯하게 앉아 작업하는 용도이고.

침대는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자리라.

은이는 편안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서재에서 책 읽던 은이에게 할아버지는 편히 앉아서 책을 읽으라고 작은 안락의자사주셨고.

대학 들어가던 해 할아버지께서,

성인이 된 은이가 오랫동안 쓰도록 상당한 액수를 지불하면서 아주 좋은 의자를 사주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셔서 은이에게 그 안락의자는 할아버지께서 주신 마지막 선물이 었다.

하지만 할머니 입원하자마자 다짜고짜 집에 들어와 안방을 차지한 고모가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바람에,

은이는 이사 나올 자기 방에 있는 물건만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

할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을  지켰다는 자책으로 은이는 무척이나 죄송한 마음인데.

그렇다고 그 문제로 고모와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가격도 적지 않고 이 집이 가구를 둘 만한 공간도 안 나와 안락의자를 까 말까 고민했지만.

작업이 끝나면 배고프다고 얼른 밥 차려먹고, 치우고.

그러고 나면 피로가 몰려와 침대에 벌렁 드러눕게 된다.

누워서는  한없이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 잠이 드니,

아, 이건 정말 아니다, 싶네.



은이는 틈틈이 외할머니가 드실 만한 음식을 궁리해 왔다.

지난겨울 외할머니 뵈러 갔을 때,

로 옮긴 병원 음식이 입맛에 맞으신가 여쭸더니. 외할머니께서는,

내가 만들 수 없는데 주는 대로 받아먹어야지,

음식 만드는 이들도 애쓸 텐데 내가 뭐라겠니, 시는 쓸쓸한 표정이라.

은이는 외할머니를 계속  병원에 갇혀있게 할 수 없다고 결심했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식사를 거르면서 아주 힘들어하셨는데.

그때 친할머니께서 몇 가지 음식을  은이와 함께 외갓집을 방문했었.

수척해 있던 외할머니께서 그 음식을 아주 잘 드셨던 기억이 .

항상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고 동서양을 아우르는 폭넓은 입맛을 누렸던 친가와 달리,

외갓집은 담백하고 산뜻맛의 제한적인 음식만 드셨는데.

그래서 외갓집 밥상은 항상

기름기 없는 맑은 국물과 물기 없이 간간하게 조린 고기.

소금물에 맑게 지진 생선이나 마른 반찬들,

그리 맵지 않은 김치와 짜지 않은 장아찌,

갓 만든 채소 반찬 한두 가지 올라가 있는,

단순하고 정갈차림새였.



어린이날 대체 휴일인 6일외삼촌은 외할머니를 병원에서 모시고 나와 외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오신다고 하셨다.

은이는 외삼촌과 외할머니께서 도착할 즈음인 늦은 오후 숙소로 7일은 종일 외할머니와 함께 하고.

큰 이모께서 도착하는 8일 ,

어버이날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집에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그전에 숙소에 잠깐 들러서 부엌에 그릇이나 도구가 뭐가 있는지,

큰 이모가 사놓았다는 식품류를 점검했다.

큰 이모 오실 때 도가니탕과 굴비 맑은 지짐에 나물 두어 가지 가져온다 하셨으니,

은이는 궁리 끝에 외할머니 드실 음식으로 다음과 같은 식단준비하기로 한다.


북어보푸라기

표고버섯 들깨무침,

고사리 장아찌,

명란젓 무침,

죽,


이상은 은이가 직접 만들어가고.

냉장고에 있는 옥도미를 굽고,

미리 양념장을 준비해 가서 외할머니가 드시겠다면 불고기도 하고 새우를 다져서 전도 지질 생각이다.

아침으로 드실 물만두는 생협에서 사고.

계란으로 만드는 계란찜이나 반숙 또는 수란은 그때그때 외할머니 주문따라야지.

간식으로는 바삭한 유과와 삶은 밤, 양갱 과일준비하면 되겠지?


그래서 일일이 황태채를 실오라기처럼 뜯어서 양념에 무친 북어보푸라기와 고소한 잣죽은 잇몸이 약한 외할머니께서 크게 반기셨고.

일주일 전부터 마른 고사리를 삶고 일부러 짤막하게 잘라 장아찌 물을 부어둔 고사리 장아찌는,

고사리도 살캉하니 잘 삶아졌고 장아찌 간장물도 새콤달콤 간이 딱 맞아서,

외할머니로부터 엄지 척, 과분한 칭찬을 들었다.

손놀림이 불편한 외할머니 드시도록 무르게 지은 밥을 숟가락에 조금 덜고.

가시를 발라낸 옥도미 한 조각 얹어 외할머니 입안에 쏙 을 때 은이는,

양가 할머니들이 어린 은이를 그렇게 밥 먹여주셨던 기억이 떠올라 목이 잠겼는데.

외할머니께서은이가 차린 밥상의 모든 것에 기뻐하시고 고마워하시며 더없이 행복해하셨다.



요 며칠 빗줄기가 오가는 구름 잔뜩 낀 리고 싸늘한 날씨 더니 오후 들어 비가 그쳤다.

외할머니께 카디건을 입혀드리고 커다란 스카프로 몸을 감싸서 휠체어로 모신다.

숙소에나와 상점들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커피 항이 좋은 카페에 들어갔고.

카페에 오면 커피를 마셔야지, 하시며 은이가 권하는 다른 음료 대신  디카페인 커피를 시키신 외할머니는,

따뜻한 커피잔을  한 모금 한 모금,

케이크도 새 모이만큼 입에 대시면서 환한 표정이신데.

은이는 예전의 그 멋쟁이 외할머니 흔적만 남아 스러져가는구나, 싶어 서글픈 기분이 었다.

미용실에 들러 단정하게 머리 다듬고,

가게에서 속옷과 양말, 세안 수건을 골랐으며,

갖가지 색상으로 손수건도 집으셨.

돌아오는 길에 많이 피로하신가 여쭈니,

숙소에 들어가서 자면 되지, 하시면서.

마치 외딴곳에 격리되어 있다가 시끌시끌한 인간세상으로 나온 듯,

직접 물건 사고 미장원에 가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니 비로소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며 재미있다 하신다.


은이가 살아갈 수많은 날들이 좋은 빛깔로만 칠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풍랑에 휘말리고 태풍에 떠밀려서 한없이 표류할 수도 있지.

그날이 오더라도 외할머니와 함께 한 아름다운 봄날,

밥을 먹고, 거리를 지나고, 카페에 들르고, 물건을 고른-

지극히 평범한 이 일상이 정성스럽게 차린 밥상과 함께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가더라도.

오늘 은이가 느낀 훈훈한 기분과 외할머니께서 보여주신 행복한 표정, 서로 간에 오고 착한 배려와 보살핌의 손길은, 

은이라는 존재 안 차곡차곡 쌓여서.

곳까지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든든한 되어주리라.

이전 02화 일주일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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